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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편 - 제20화 부민관 폭파사건
김두한 편
제20화 부민관 폭파사건
1969.11.05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이정재 씨 얘기를 하다 보니까 해방 후 이기붕 씨까지 언급하게 됐는데, 그 부분은 앞으로 나올 얘기니까 해방 전으로 되돌아가서 부민관폭파사건에 관련됐던 일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 어느날 제 사무실에 대학생과 고등학교 3학년쯤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와서 폭약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마포강 위에 행주강이라고 있는데, 거기서 고기를 잡겠다는 거예요.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물고기는 낚시나 그물로 잡아야지 폭약으로 잡는다는 게 어째 의심스럽더란 말이에요.

주위 사람들도 폭약인데 주었다가 잘못되면 우리가 책임져야 하니까 절대 주지 말라고 해요. 하지만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나 대학에 다니는 젊은이가 많지 않은데다 배운 사람들이 거짓말 하겠냐 싶어서 폭탄 한 댓자루 가지고 나라를 뒤집을 건 아니라 생각해서 내가 줬단 말이에요. 이 친구들이 이 폭탄을 가지고 가서 깡통에 넣고 실로 심지까지 넣어서 다이나마이트를 만들었어요. 친일파 앞잡이로 박춘금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동경에서 약장사하던 놈인데, 관동대지진 때 일본놈 앞잡이로 대학살에 참여해 그 공로로 일본 중의원까지 지냈지요.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인데, 박춘금이가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아 대의당을 만들어 명월관에서 발기대회를 갖고 부민관에서 결단식을 하기로 했을 때입니다. 학생들이 내가 준 폭탄으로 만든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부민관에 들어가서 딱총성냥으로 불을 붙여 던졌는데, 그게 단상 위로 제대로 날아갔으면 윤봉길 의사가 한 것처럼 아베총독을 비롯한 일본 고관들이 다 죽을 건데, 하필이면 밑창에 떨어진 거예요.

─ 단상 밑이요?

▲ 네, 거기서 터지는 바람에 앞에 있던 사람만 다쳤지, 높은 놈들은 멀쩡했지요. 지금도 국회의사당 단상이 높잖아요. 그래도 한 1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니 큰 소동이 났지요. 그때는 전시라 비상정국이니 옴짝달짝 못하고 학생들이고 뭐고 다 잡혔어요. 그때 고문 하면 세계적 수준인 독일과 맞먹을 정도로 일본도 셌으니, 콧구멍에 전기찜을 하고 화약가루를 막 집어넣고, 대꼬챙이로 쑤시니까 학생들이 안 불 래야 안 불 수가 없거든요. 폭탄에 대한 근거가 나와야 하니까. 아, 그래서 내가 사무실에 있는데 벼락같이 헌병대와 경찰이 쳐들어와 날 잡아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고는 바른대로 대라고 헌병대 지하실에서 갖은 고문을 다 하는 거예요. 아무리 학생들이 고기 잡는다고 해서 폭약을 줬다 해도 안 믿는 거예요.

─ 김선생님이 학생시켜서 총독 고관들을 죽이려 했다고 몰고 가려고 한 건가요?

▲ 그렇게 조작하려고 한 건 아닌 것 같아요. 헌병대측에서는 단지 고기 잡는다고 학생들에게 폭약을 줬다는 사실이 좀 믿기가 어려웠겠지. 내가 갖은 고문에도 아니라고 우기니까 헌병들이 학생들과 날 대면시켜 줬어요. 대질심문이지. 거기서도 내가 한결같은 얘기를 하고 학생들도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제서야 내가 고의적으로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고 믿는 눈치더군요. 구사일생으로 살아 났지만 고문으로 인해 내 몸은 절단났어요. 그 일로 인해 반도의용정신대 대장에서 스스로 물러나 평단원이 됐어요.

─ 압력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 네. 조선총독부에서 내가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화약을 쓰는 방법을 정확히 몰라서 저지른 일이니 한번 용서해주라고 해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고문후유증으로 몸을 수양해야 했고, 요시찰 인물이 돼서 예비검색이니 뭐니 해서 수시로 경찰서에 집어넣으니까 대장 노릇을 할 수가 없었지요. 한 번 경찰서로 끌려가면 보통 29일씩 붙잡혀 있습니다. 그때 서울시에는 경찰서가 8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29일씩 있으면서 한바퀴 돌면 봄에 들어간 사람이 백설이 흩날릴 때 나오게 됩니다. 이런 고초를 8개월간 겪다 결국은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 거죠.

─ 그럼 8월15일 해방의 감격을 감옥에서 맞이하신 건가요.

▲ 예. 천황의 발표는 못들었고 경찰서를 들락거린 덕분에 곧 해방이 될 거란 얘길 들을 수 있었죠. 그 당시 유치장에 들어가면 사상범들은 잡범들과는 별도로 한 곳에 수감합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사상이 불손해 들어오면 모두 사상범이니까. 그 당시 경찰서 유치장은 완전히 지옥입니다. 유치장 안에 변소간이 있고, 똥통 앞에서 밥 먹고 잠을 자야 하므로 냄새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때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독일이 패망했고 곧 일본이 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면서 그들은 조금만 참으면 좋은 세상이 오니 몸조심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죠.

─ 경찰서에 들어가서 나온 건 언제였나요.

▲ 해방되기 두 달 전이었어요.

─ 서울에서 천황이 방송하는 것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떻던가요.

▲ 기록에도 있지만 연합군들이 서울운동장으로 집결한다는 말이 있어서 내가 환영준비한다고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서울역 옥상 꼭대기에서 태극기를 들고 휘둘렀죠. 그만큼 감개무량했던 거죠. 아무리 용맹하고 똑똑해도 국민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제대로 일하려면 국가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당시에 나라 없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느냐 이 말이에요. 둘 중에 하나밖에 더 해요. 만주로 뛰어들면 독립운동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친일 해야지 별수가 있던 세상이냐구요.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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