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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편 - 제19화 이정재와 결의, 형제맺음
김두한 편
제19화 이정재와 결의, 형제맺음
1969.11.04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역기가 부서졌단 말이죠.

▲ 네. 역기 연습을 많이 하면 몸에 근육이 붙어버려서 손이 느려지게 됩니다. 싸울 때는 주먹이 눈보다 빨라야 합니다. 눈 깜박하는 게 2분의 1초 아닙니까? 하지만 주먹은 반의 반 초가 돼야 합니다.

─ 음, 반의 반이라……

▲ 그렇죠. 그 만큼 속도가 빨라야 상대가 맞지. 그런데 역도해서 근육이 찌면 손이 느려지니까 전 역도를 안 하거든요. 그러게 그냥 보트를 탔으면 되는데, 괜히 역기를 들어가지고……
역기가 부서지니까 앞가슴에 시꺼멓게 털이 난 친구들이 ‘이 자식아, 역기를 들려면 잘 들어야지, 이게 뭐야’ 했겠죠. ‘이봐, 힘이 약해서 그런 거니 물어주면 될 텐데 왜 군소리야’ 하고 내가 대꾸하고, 그 친구들이 다시 ‘여자만 데리고 다니면 제일이야!’ 이러면서 덤비는 거예요. 갑자기 쑥 들어와요, 이게. 그래서 슬쩍 피하고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딱 치니까 급소를 맞아서 푹 고꾸라졌지요. 한 놈이 쓰러지니까 동료들이 ‘이놈이 사람 친다’ 하며 연거푸 들어와요. 하는 수 있습니까. 연거푸 치니까 모두 다 픽 쓰러져 버렸지요. 여자를 슬쩍 보니까 제 옷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어요. 오빠도 안타까운 표정이고. 자기 오빠를 때리던 불량배들을 때렸을 때는 통쾌하고 고마웠지만 지금은 아닌 거죠. 제 본질이 들통났으니 산통 다 깨진 거죠 뭐.
요즘은 결혼하기 전인데도 뽀뽀하고 어린애 배고 하는 제트기 시대라지만 그때는 순박했거든요. 손 한 번 못 잡습니다. 그때는 요리집에 가서도 기생들을 만지지도 못했어요. 눈치 너머로 보고는 처분만 기다리는 거지.

박양은 그때 타이프라이터 학원에 나가고 있었어요. 오빠가 알려줘서 끝날 때쯤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해서 오랜만인데 저녁이나 먹자고 했더니 겁을 먹더군요.

하지만 지금의 미도파 자리에 있던 경자옥이란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화장품도 사주고 달래면서 간신히 잘 돼서 어느 정도 사귀어가는데 전에 얘기했던 헌병대 사건이 터져서 잡혀 들어가지 않았겠어요. 나와보니까 박양 집안이 벌컥 뒤집혀서 김두한이란 사람과 계속 만나다간 큰일나겠다 싶어서 박양 어머니가 강제로 약혼시켜서 경기도 안성의 외갓집으로 보내버렸어요. 그러니 뭐 어쩌겠습니까. 딸 내놓으라고 공갈을 칠 수도 없는 형편이고 해서 그렇게 첫사랑이 실패로 끝난 거지요.

─ 주먹 덕분에 연애를 할 뻔했다가 주먹 덕분에 또 안 된 거군요.

▲ 그만 본질이 들통나는 바람에 그런 거지요.

─ 연애 얘기가 더 있겠죠. 하지만 해방 임박해서 다른 이야기가 한둘 더 있을 것 같습니다. 해방 전에 이정재란 사람과 알고 지내면서 결의형제를 맺었다는 얘기가 있던데……

▲ 제가 반도의용정신대라고 징용 안 가려고 만든 거 있잖아요. 그때 우리가 모은 1만 명의 어깨 중에서 중학교 출신이 이정재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그 사람이 경기도 이천 출생으로 서울에 왔었는데 씨름꾼에다 아주 장사였어요.

─ 그분이 중동중학교 출신인가 그렇죠?

▲ 그런가요. 확실히 모르겠지만 중학교 출신은 이정재밖에 없어서 총무를 봤지요. 집안이 좋아서 공부도 했고 운동도 많이 했지요. 징용을 나가야 할 때라 징용 피하려고 우리 단체에 들어왔는데, 저와 친밀하게 지냈죠. 해방 직후에는 저와는 다른 반공청년단에 있었어요.

─ 해방 후에도 한동안 친밀하게 지냈잖습니까?

▲ 물론입니다. 제가 이정재를 이기붕 씨에게 추천해서 자유당 서울시 감찰부장을 시켜줬으니까요. 그 사연이 이렇습니다.

제가 대한노총 최고위원을 했거든요. 그래서 자동케이스로 자유당 중앙위원이 됐어요. 그때 이기붕 씨가 국민회의 이활이란 사람과 자유당 서울시 시당위원장을 경합할 때였습니다. 이기붕 씨는 당시만 해도 국방부장관으로 재직 중일 때 국민방위군사건의 책임자를 총살시키는 등 양심적이고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그분을 존경해서 국방부장관으로 물러나 낭인으로 계실 때 그분을 서울시 시당위원장으로 밀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기붕 씨는 돈도 없었고 조직도 잘 모르기 때문에 내가 돈과 조직을 다 대주었지요. 제가 그때 대한노총을 거머쥐고 있었기 때문에 군납으로 하루 몇천만 원의 수입이 있었지요.이기붕 씨는 당선되자 제게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정재를 추천했지요. ‘만송 선생, 학식도 있고 나와는 아주 절친한 친구인데 자리 하나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했더니 이정재가 잘할 수 있는 일이 감찰부장이라 그 일을 줬지요.

이정재와 함께 사형당한 임화수라고 있잖아요. 그 친구가 이정재랑 나를 찾아와서 동대문시장 건너편의 제일극장을 불하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도와준 적이 있지요.

─ 그러다가 자유당 말기쯤에는 이정재씨로부터 협박도 당하고 권총을 들이대고 했던 사건도 있었다면서요.

▲ 이박사가 대통령을 두 번만 하고 깨끗이 물러섰으면 손문 선생처럼 위대한 분이 되는건데 제가 개헌을 반대하니까 저를 제명처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기붕씨가 힘으로는 안되니까 이정재한테 가서 협박해라 해서 국회의사당에서 조병옥 박사, 장택상씨하고 얘기를 하는 도중에 나한테 권총을 갖다 댔지요.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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