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 김좌진 장군에게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아들을 오늘 처음 봤다며 껄껄 웃더니 보안과장을 부르더군요. 보안과장에게 내가 그 유명한 김좌진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고 얘기하니까 보안과장 눈이 휘둥그레졌지.
그때나 지금이나 말단들이나 아무나 잡아가고 그랬지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점잖아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길래 앞으로 징용에 내보내는 사람들에게 최소한도의 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는데, 내가 그 일을 맡고 싶다고 했죠. 그러면서 최근에 아사히신문에 기사가 난 큐슈 탄광사건을 예로 들었어요.
조선 징용자들이 가스가 차 있는 탄광에서 촛불을 켜는 바람에 폭발한 건데 이는 징용자들을 교육을 안 시켜 몰라서 그런 것이니 앞으로도 교육을 안 시키면 이런 일이 계속 발생할 거라 했습니다. 내게 맡겨주면 군사 훈련뿐 아니라 정신 훈련도 잘 시켜서 보내겠다고 하니 단게 국장이 ‘자네 아버지는 독립군 사령관이지만 당신은 황국신민으로서 이번 전쟁에서 우리에게 협조하겠단 말인가’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나는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시대도 지났으니 대일본 국민으로서 아시아의 대동아 공영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깨달은 바 있다고 대답했지요.
─ 감쪽같이 속아넘어가던가요.
▲ 그럼요. ‘대신 사무실과 먹을 것(그때는 배급제였으니까요)과 돈을 좀 주셔야겠습니다’ 했더니 보안과장에게 협조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경기도 경찰부장이었던 오카를 소개받아서 지금 국세청 뒷터에 반도의용정신대를 만들게 됐지요. 징용으로 끌려가게 된 5천여 명의 동지들을 구할 수 있었던 거지요. 일정 기간 동안 훈련만 받으면 소집 영장도 안 나오고 배급도 나오니까 금세 1만 천여 명으로 늘어났어요. 종각 뒤 골목으로 들어가면 부병루라는 큰 곰탕집이 있었는데, 그 근방의 1백평짜리 건물을 썼고, 하루 소 두 마리씩, 빵 몇 만 개 등을 배급받았지요. 임시로 훈련받을 장소로는 수색이 선정됐지요. 그 1만 명을 한달에 1천 명씩 돌아가며 훈련시키면서 징용을 연기하다가 해방이 됐지요.
(입력일 : 2007.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