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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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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편 - 제9화 장충공원에서 일본깡패와 겨루던일
김두한 편
제9화 장충공원에서 일본깡패와 겨루던일
1969.10.23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한국 건달과 일본 건달패의 싸움이지만 일본과 조선 민족의 싸움이 된 거지요.

술집에서 한판 했으니까 중간 오야붕과 겨루는 거지요. 이번에 이기면 일본 마을로 쳐들어가 진짜 오야붕과 겨루는 겁니다.

아침 6시, 장충단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어요.제 오른팔은 김무옥이라고 전라도 광주 출신인데, 유도 4단이에요. 나중에 ‘팔도사나이’란 영화 보면 박노식이가 연기한 주먹이 바로 김무옥이지요.

왼팔격인 문영철은 상해에서 직업 권투 선수였죠. 권투 선수도 싸움꾼 출신과 운동만 한 두 종류가 있는데 영철인 평소 싸움을 잘 하다가 프로로 전향한 선수였기 때문에 실전에도 아주 강했지요. 이 둘을 포함해서 제 동지 6명을 데리고 갔어요.

우리는 저들이 일본도를 가지고 올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쇠파이프를 준비해 손잡이에 고무를 감아서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가죽장갑을 끼었어요. 배에는 고무 호스를 세 겹으로 감았지요. 그러면 웬만한 칼로 찔러도 들어가질 않아요. 금만 가지. 심장하고 복부만 안 맞으면 되거든요. 그래서 광목 감듯 쭉쭉 감는 거죠. 구두도 신으면 안 됩니다. 시합 때 권투선수들이 신는 신발을 신어야 돼요. 그냥 신발은 벗겨지니까.

그날 따라 안개가 자욱했어요. 잘 보이지 않는데 갑자기 옆에서 뭐가 번쩍 해요. 일본놈들이 곡괭이를 들고 온 거예요. 소방수들이 불 끄기 위해 들고 다니는 것 있잖아요. 손잡이부터 전부 쇠로 만든 곡괭이가 있어요. 옆으로 피하면서 슬쩍 치니까 곡괭이 하나가 떨어지는데, 맞아서 떨어질 때 일본놈들은 ‘이타이이타이’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아야야야’ 하는 것처럼. 근데 ‘아야야야’ 하는 놈도 몇 놈 있는 거예요. 평소엔 일본놈처럼 일본말 하고 행동하지만 맞을 땐 본색이 드러나는 거예요. 일본놈보다 엽전이 더 밉더구만.

내가 서로 등을 지라고 했어요. 6명이 3명씩 붙어서 등을 지고 휘두르고 때리고 치고 나가다 보니 먼동이 트더군요. 한 40분 정도 후다닥거리니까 햇빛이 장충단 공원을 비추면서 안개가 걷히는데, 늘비하게 쓰러져 있더구만요. 근데 저 앞에 일본도를 턱 쥐고 앉아 있는 놈이 있어요. 누군가 했더니 바로 하야시 구미 원오야붕이에요.

저는 쇠파이프를 버리고 오야붕 앞으로 나갔어요. 충무로 2가의 오야붕도 그 옆에 서 있더군요. ‘당신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곡괭이나 일본도 안 쓰고 단도까지는 괜찮다고 했는데 뭐냐, 일본 무사도 정신에 위배되는 것 아니냐. 당신 언제부터 이렇게 비겁했느냐. 칼 놓고 다시 하자’고 하니 하야시가 칼을 버리고 일대 일로 붙으라고 명령하더군요.

우리는 6명, 저들은 수십 명이었어요. 부하들은 가만 있으라고 하고 내가 수십 명의 가운데로 척 들어가니까 내 허리를 잡으려고 무더기로 들어오는 거예요.

사람 조지는 것이 내 직업인데 좀 잘합니까. 10여 명 즐비하게 떨어지니까 안 되겠거든. 원오야붕이 그치라고 명령을 하고 ‘긴또깡, 이리 오너라’ 합디다. 오야붕들은 대접을 할 줄 아니까. ‘너 훌륭하다, 너와 같은 부하가 옛날부터 필요했다. 나와 형님 동생으로 친하게 지내지 않겠느냐’고 해서 하야시 구미 원오야붕의 집으로 갔습니다.

집 입구에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도를 쭉 들고 양 옆으로 서 있더군요.해방될 때까지 주먹생활 하던 이야기가운데 앉아 제가 무릎을 꿇고 ‘나이 어린 동생으로 여러 가지로 잘못한 일도 있으니까 용서해 주기 바랍니다’ 했더니, ‘우리는 형제다. 나는 형님, 너는 동생이다. 술 한잔 하자.’ 그걸로 형님 동생이 됐습니다. 내가 당시 스무살이고 그 사람이 한 쉰쯤 됐어요. 머리가 희끗희끗했으니까.

그때부터는 해코지하지 않아요. 원칙적으로 따지면 주먹으로는 내가 이긴 거예요. 대접상 형님 동생 할 뿐이지. 그때부터 한 달에 1천원씩 보내줬어요. 설렁탕 한 그릇에 10전, 담배 한 갑이 10전, 냉면이 15전 할 때였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3천만 원 정도 되는 큰 돈이죠. 인사동에 집 한 채를 사고 남는 돈이니까요.

하야시가 돈을 보내주는 이유는 자기 구역을 침범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죠. 단성사를 비롯해서 조선극장이나 우미관 같은 곳에서도 한달에 1백원이나 50원씩 봉투에 넣어서 보내왔어요. 당시 조선총독 월급이 1만 원인데 내 수입이 2만 7천 원 정도 됐지요.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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