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야쿠자의 한국 지부가 있었다면서요.
▲ 한국지부가 지금의 충무로 1가에서 5가까지를 자기 구역으로 갖고 있었지요. 건축토건업이 주종이고 곡마단, 영화, 흥행, 도박 사업들을 했지요. 일본시대에는 도박이 합법이었어요. 구역마다 오야붕이 다 다른데, 우리랑 제일 먼저 붙은 게 하야시 구미(패)였죠. 이들의 나와바리(지역)가 명동 입구. 지금의 시민극장이에요. 일제 땐 ‘명치좌’라 했는데 그 건너편이 아사히 비루 회관(김두한의 회고록에는 ‘마루비루’로 나온다)이었어요. 그곳엔 전부 일본 여자들이 접대를 했죠. 하루는 그곳에 술을 먹으러 갔습니다.유명한 권투선수인 정복수가 있었어요. 탱크처럼 파고들어 가서 조지는 스타일이고 또 신의주 출신의 권투 선수도 기술이 세계적이었지요. 박모씨라는 권투 선수 출신도 있었어요. 그때 동양 권투의 패권은 조선 사람이 쥐고 있어서 권투 선수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일본 선수들을 모두 다운시킨 5명의 조선 선수를 내가 초대한 거지요. 일본 여급들이 권투선수가 왔다고 난리가 났어요.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고 아양을 떠니까 하야시 구미 꼬붕들이 아니꼬왔나 봐요. 우리 쪽으로 갑자기 사라(접시)를 던졌어요. 박모씨가 일어나서 그쪽으로 가려고 하길래 제가 만류하면서 내가 ‘뭐냐’고 했죠. ‘너의 왜 남의 술자리에 접시를 던지느냐, 한번 붙어볼까’ 하니 덤비더군요.
권투하는 사람들은 실전에선 그만큼의 실력이 안 나옵니다. 링에서 글러브 끼고 하는 것과 실전은 다르거든요. 저쪽은 두 뺨짜리 단도를 가지고 있는데, 일본 야쿠자 특기가 빼들고 찌르는 거예요.7, 8명이 빙 둘러싸길래 가운데로 쓱 들어갔어요. 요즘 중국 영화에서 보는 그런 식이었지. 아주 재미있습니다. 단도를 들고 빙 둘러쌀 때 가운데로 척 들어가는 것이 기운이 세서 들어가는 게 아니예요. 간덩이가 크지 않으면 안 되죠. 푹 찌르면 죽잖아요. 쓱 들어갈 때 벌써 두 명은 공중으로 뜨는 거예요. 뒷발에 한 놈이 뜨고, 정면의 한 놈은 바른 발에 걸린 거죠. 6명 남았잖아요. 단도 들고 휙 들어오면 옆으로 살짝 비키면서 왼발로 옆구리를 탁 치면 끽 하고 쓰러집니다. 이어서 들어오는 놈은 왼쪽으로 비키면서 오른발로 쳐버리고, 몇번 그러니까 6명이 뻗습디다. 즐비하게.이때 어떻게 알고 순사들이 호루라기 불고 막 올라오더군요. 제가 싸움이 끝난 다음에 들어오라고 ‘서라’고 했죠. 칼이 번쩍번쩍 하니까 일본 순사도 그때는 못 들어옵디다. 일본 사람들 보기에도 영화가 아니고 실화니까 멍 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죠. 둘 남았잖아요. 둘은 그냥 먹는 거거든. 일본사람들은 깨끗해요. 단도를 앞에 탁 갖다 놓고 ‘형님’ 하는 거예요.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죠. ‘몰라뵀습니다.’ ‘좋다, 가라.’ 적어도 수백 차례 싸운 경험이 없으면 여러 명이 단도를 들이대는 가운데로 과감히 들어가지 못합니다. 기운 세면 뭘 해요. 역도산도 일본의 조그만 사람들한테 칼에 찔려 죽지 않았어요. 칼에는 장사 없거든. 담대해야죠.그 소문이 일본촌 일대에 났습니다. 칼 잘 쓰는 8명이 덤벼들었는데 종로통의 곰보딱지 긴또깡이 일본 여자 50명과 순사들이 보는 자리에서 쓱쓱 치니까 다 나가 떨어졌다고 말이죠. 순사들도 내가 정당하니까 나를 못 잡아갔죠.그후 도박판에 갔다가 그 지역 오야붕을 만났어요. ‘나도 꼬붕이 많으니까 한 달에 5백원씩은 나에게 보내라, 그리고 나와바리 침범하지 마라, 피차 피 흘린다’고 말했죠. 무슨 소리냐고 하길래 그러면 남자답게 한번 붙자, 비겁하게 일본도나 곡괭이 들고 나오지 말고, 단도까지는 괜찮지만 맨손 대 맨손으로 대결하자고 해서 붙었죠.이래서 지금 장충체육관 자리에서 한판 붙기로 했죠.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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