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미관 뒷골목 시절 그때의 주먹계는 어떠했습니까?
▲ 그 당시에는 극장을 중심으로 요즘 사회에서 말하는 깡패, 즉 주먹신사들이 있었죠. 극장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이 바로 우미관 옆에 있는 조선 극장과 종로 삼정목에 있는 단성사 극장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그때는 깡패라는 말이 없었어요. 깡패라는 말이 언제부터 사용됐냐면 10년 전 3대 국회 때 조병옥 박사와 장택상 씨가 주축이 돼서 장충단에서 국민투쟁위원회 강연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제가 경비과장이어서 부하들 시켜 경비를 했는데, 이정재와 임화수를 중심으로 수백 명이 몰려들어 난동을 부렸습니다. 유지광이 직접 지휘했는데, 그때 제가 보호하지 않았다면 조병옥 박사나 장택상 씨가 크게 다쳤을 거예요. 그때 유지광 패거리들이 깡통에 모래알을 집어 넣고서 조박사가 강연을 하면 깡통을 두드려서 야지를 놓았고, 깡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지르고 그랬어요. 그래서 주먹 패거리들을 깡패라고 부르게 됐죠. 일정시대적에는 어깨라고 그러고, 건달이라고 그러고, 그 계급위에는 일본말로는 야쿠자라고 그러고 한국말로는 고상하게 협객이라고 했습니다. 국제극장에서는 `팔도 사나이`라는 영화가 했습니다. 그게 나의 일대기를 그린것입니다.
─ 원노인이 돌아가신 후 우미관 뒷골목에 나섰다고 했는데, 최고 오야붕이 되기까지 어떤 주먹들을 만나셨는지…
▲ 우미관에 진출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내 밑에는 내 인간성에 매료돼서 부하가 된 애들이 한 삼십 명 정도 됐어요. 하지만 오야붕이 되려면 꺾어야 할 협객이 많았지요.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구마적과 신마적, 그리고 제자리에서 전봇대의 외등을 발로 차 깨는 뭉치와 리어카를 길이로 세워놓고 6,7미터 되는 거리를 날며 발차기를 하는 셔츠(제비) 등이었죠. 하지만 이들은 모두 힘없는 자를 괴롭히거나 포악하게 행동하는 등 협객의 길을 포기하고 있어 이들을 모두 손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겁니다.
구마적과 신마적은 특히 유명한 가다(어깨) 오야붕들이었죠. 도둑놈 괴수라는 뜻에서 별명이 마적이었는데, 구마적 기운이 얼마나 셌냐면 요새 자동차보다 두 배는 무거운 옛날 자동차 있죠? 그 차가 펑크가 나면 왼손으로 차를 들고 담배 한 대 피우면서 부하한테 펑크 때우게 할 정도였어요. 손가락으로 잣을 으깨고 동전도 우그러뜨렸으니까요. 6척 장사라 그 사람한테 멱살을 붙잡히면 대롱대롱 매달려서 거의 죽거든요. 신마적은 구마적보다 더 힘이 센 강자지만 나이가 몇 살 어리기 때문에 협객 간의 의리로 구마적과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사이입니다.전 구마적과 신마적을 제압하지 않으면 종로 협객 사회에서 오야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중 앞에서 선배를 때릴 수는 없고 해서 조선극장 뒤 넓은 터로 불러냈지요. 구마적은 성이 고씨로 저보다 7살 위였는데, 어느날 ‘고형 잠깐 봅시다’고 했더니 ‘왜 그래 임마’ 하고 대뜸 뭐라 해요. 그래서 제가 ‘왜 욕합니까’ 하니 ‘네까짓 게 나를 보고 말 게 뭐 있어’ 하더군요. 그때가 극장이 파할 때쯤이니까 밤 10시 정도인데, ‘형님에게 충고하겠는데, 싸움이란 자기보다 세고 훌륭한 사람을 때려야지 아침밥도 못 먹는 아이들, 극장에서 거적떼기 깔고 자는 아이들을 때려 갈빗대나 부러뜨리고 그래서야 선배라 할 수 있겠소? 후배를 사랑하지 않는 선배는 존경할 수 없으니 내가 당신을 좀 때려야겠소. 극장 앞 사람이 많은 데서 형님이 맞으시면 곤란하니 갑시다’ 하곤 조선극장 뒷터로 갔습니다.휙 뜨면서 두 발로 안면을 내질러 버렸으니, 내가 25관, 구마적이 30관, 합해서 55관이 부딪치니까 팍 고꾸라질 것 아니오. 일어나는 것을 정면에서 눈과 코 사이의 급소를 다시 발차기로 날리니 뻗어버리더군요.
단 두 방에 구마적을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신마적에게도 들어간 거예요. 신마적은 조금 젊어 스물넷인데, 대학 중퇴를 해서 인텔리에요. ‘ 약한 사람이나 불쌍한 동생들을 왜 때리냐, 싸움이란 자기보다 센 사람과 해야지 저항하지 않는 사람 왜 때리냐’고 했더니 ‘니가 형한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더군요. 엔젤이란 카페에서 문을 닫아 걸고 두들겨 팼지요. 그리고 나서 뭉치와 셔츠도 쓰러뜨렸지요. 그래서 종로에 오야붕이 된거죠. 그외에 시금문의 역도 씨름패들과 동대문패, 서대문패(동양극장), 사지골패, 한강장사패 등의 조직이 있었습니다. 역도 잘 하는 놈, 철봉 잘 하는 놈, 싸움 잘 하는 놈, 박치기 잘 하는 놈, 힘이 아주 센 놈 등 그때가 어깨 전국시대였어요. 그놈들과도 많이 겨루었지요. 지금의 국도극장 자리에 황금좌란 일본극장이 있었는데 이곳도 내가 점령했죠. 스카라극장과 야초극장, 제일극장도.이렇게 해서 전 서울을 ‘나와바리(구역)’로 만들고 무적이 됐습니다. 그후 전국을 돌며 주먹들과 싸웠죠. 인천에서는 뱃사람 출신인 갈고리패와 싸웠고, 목포, 전주, 광주 이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휩쓸어 스무 살 때 전국의 오야붕이 된 거죠. 그때 다들 저를 ‘잇뽕’이라 불렀죠. 미국식으로 말하면 ‘원 펀치’. 내게 한 대만 맞으면 뻗는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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