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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 편 - 제6화 소년시절과 우미관 뒷골목 이야기
김두한 편
제6화 소년시절과 우미관 뒷골목 이야기
1969.10.19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지난 시간까지 선생님 소년때 이야기를 들어온 셈인데요. 특히 원노인, 형평사 부회장님과 하던 백정조합에...그분이 김선생을 알아가지고 거두게 되면서 공부를 하지말라고 했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소학교 2년만 다닌 결과가 됐는데, 왜 공부를 하지 말라고 했나요?

▲ 두가지가 있죠, 공부를 해서 지식이 많이 들어가면 두가지 문제가 있죠. 하나는 친일파가 되어야 한다는것, 일본사람한테 배우니까 머리가 근본적으로 나쁘진 않으니까 자기 이해타산에 가까워지니까 친일파가 된다는 것이고, 또하나는 공부를 하면 반일사상이 빨리온다는 것 이러면 신변이 위태롭다는 것. 그때 김좌진 장군의 혈육, 만주에 가서 배다른 동생하나 낳지만 혈육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혈통이 끊어진다. 혈통하나 유지하기 위해서 장성할때까지 공부를 하지 마라. 이렇게 해서 공부를 안시켰던 것이죠. 설렁탕 장사를 해서 하루 몇십원씩 버니까 그때 돈으로 크거든요, 공부는 하지마라 운동만 해라.

- 이상한 일입니다. 공부를 하면 자칫하면 친일파가 되고, 공부를 옳게해서 일본이 왜 이렇게 되어 있냐는 것을 알게되면 반일사상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해서 일본 사람한테 잡혀갈지도 모르고. 결국 공부란 것은 친일파가 되던지 두드러지는 반일운동가가 되던지 이런 결과가 오면 김좌진 장군의 후사가 끊어진다.

▲ 둘다 끊어지죠. 이거해도 끊어지고 저거해도 끊어지고. 친일을 하게되면 가문 전체의 독립운동선에서 탈락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반일운동을 하면 일본놈들이 잡아다 죽일테니까 그렇니까 이것이 보통 독립운동가의 아들과 달라서 독립군 총사령관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왜냐면 마지막 전장을 일본놈하고 수만명이 나남사단에 들어가서 죽지않았습니까? 그때 전 만주에 있는 독립군이 통합을 해서 독립군단이 됐어요. 그 독립군단의 총사령관이 됐거든, 그때 총사령관은 대단했거든. 그래서 보통 독립운동한 사람의 아들과는 그사람들(일본)이 노리는 목표가 다르죠. 혹시 계통적으로 자기 아버지 뒤를 이어서 나오지 않을까.

- 그때 일반인들에게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나요?

▲ 원노인이 싸고 돌아서 일체 알리질 않았죠.

- 원노인은 남에게 뭐라고 하고 알리지 않았나.

▲ 외부사람들에게는 양아들이라고 했으니까요.

- 주로 공부는 안하지만 몸은 건강해야겠다해서 운동을 시키고 이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 조선극장이라고 한국사람, 신씨라고 하는 부자가 경영을 했는데, 인사동 종로구청 바로 옆이죠. 7백평짜리 4층집이에요. 그때 극장은 그게 최곱니다. 그래 그 앞에 가서 극장가면 전부 활극아니에요? 서부활극 게리구퍼 같은 이가 그때가 20 당년이니까. 그러니까 밤낮 치고 때리고 총질하고 하니까 순전히 그런것만 보는거에요. 17살적부터 조선극장 옥상에다가 샌드백을 갖다 놓고 치고 뒷발길질로 때리고, 또 한길 높이고 발길로 차고, 한길반 또 올리고, 1미터씩 조금씩 조금씩 올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완전히 두길을 뛰는 거죠. 왠만큼 싸울때는 휙 뛰면서 어깨를 짚고 급소를 치면, 태권도 당수하는거 마냥 치고 나가거든. 그때는 그런 기술이 없었단 말야. 손보단 발길질이 빨랐죠. 크면서 25관 키는 18세에 키는 다컸죠. 그리고 샌드백이 내 중량보다 무거운것을 쳤다구. 매달아놓고 그러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내 중량과 비슷한 사람이 없었거든. 그냥 치면 맞아 떨어지고 아주 센사람은 발길로 차면 주먹으로 치는 것보다 약 5배의 탄력이 있으니까 25관이 치면 저쪽 상대가 들어올거 아니에요? 한 30관짜리가 들어오면 30관하고 25관이 부딪히면 55관의 힘이 생기거든 그러니까 나가 떨어지는 것이지.

- 선생님 손이 몹시 작습니다. 몸에 비해서.

▲ 그런데 손이, 샌드백을 치고 운동기구를 만지고 해서 커졌는데, 대개 술집에서 술을 먹고 있으면 기생들이나 손님들이 내 손을 자꾸 쳐다봐요. ‘김선생 손은 수박덩이 같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열일곱 먹은 소년 손처럼 예쁘냐’고 합니다.

- 피부도 아주 곱습니다, 여자처럼.

▲ 곰보만 아니면 저도 미남잔데…

- 공부 하지못한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잘했다고 생각합니까?

▲ 아니예요. 공부를 했다면 좀더 큰 일을 했겠죠. 우리나라를 위해 더 큰 일을 많이 했을 거예요. 제가 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국회에 들어갔는데 참 땀깨나 흘렸습니다. 주먹이나 쓰고 정치 테러만 하던 놈이 경제 정책에 대해 얘기하는데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있나. 종로 을구에서 당선됐는데 윤보선 전대통령께서 바로 내 옆에 앉아 있고, 내 앞에는 김도현 박사가 앉아 있었어요. 서대문 갑구에서 당선됐던 경제학 박사 말입니다. 요즘이야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경제학 박사가 많지만 그때만 해도 드물었거든요. 저는 매일 김도현 박사의 대머리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하루는 김박사가 손을 번쩍 들기에 나도 얼떨결에 손을 번쩍 들었죠. 그랬더니 자유당 고참의원 한 분이 와서 툭 치는 거예요. ‘여보, 김형. 당신은 여당인데 왜 야당 편을 들어 손을 드시오’. 스타일 여러 번 구겼죠.

- 공부하지 말라고 한 원노인을 원망합니까?

▲ 원망은 안 합니다. 혈육을 끊지 않으려고 옛날에도 삼족을 멸하는데 치마속에다 감춰가지고 뒷담으로 올라가서 벽지에다 뒀다가 다시 정권이 바뀌면 돌아와서 공부시키지 않아요? 그때는 시대가 왠만큼 하니까 공부를 안시켰죠. 그러나 만약 중학교라도 공부를 했으면 좀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일을 했고, 아무리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역시 공부를 못하니까 참 식은땀이 줄줄 흐를때가 있습니다. 국회의원할때고 경제쪽을 모르니까 경제학은 적어도 전공을 10년이상 해야하는데 난 완전히 문외한이거든. 그러니 그때 낙원동 있을때 돈좀있고 하니까 사랑채에 경제학 교수를 데려다 놓고 공부를 배웠는데 도무지 모르겠더라구. 그러니까 국회의원 4년하고 용산에서 보궐선거 2년하고 6년정도 하면서 공부조금 하고 국회에 들어가니까 조금 말문이 트이는 거야. 아직도 모릅니다.

- 그래도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람보다도 더 널리 알려지고 국회의원까지 하시고 이렇게 된점을 보면 머리가 상당히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지금 젤 섭섭한게 그때는 대한민국 수립할때까지 10년동안 공산당과 싸웠는데 국민들이 협조를 안했어요. 그리고 제일 방해한게 미국사람들이 방해했어요. 미국 CIC가 전격적으로 방해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까. 납치 살인 방화하니까. 미국사람들이 그런거 젤 싫어하거든. 한국사람은 협조 안하고 미국사람은 방해해고 하니까 공산당하고 싸우는 것이 3년갔죠. 그렇지 않았으면 1년만에 끝났을겁니다.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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