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스타앨범 / 나의 데뷰
유쾌한 응접실 / 정계야화
노변야화 / 주간 종합뉴스
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노변야화
김두한 편 - 제2화 부친 김좌진 장군의 독립운동 얘기
김두한 편
제2화 부친 김좌진 장군의 독립운동 얘기
1969.10.15 방송
1969년 10월 14일부터 1970년 1월 26일까지 방송된 ‘노변야화’ 김두한편에는 김두한의 출생부터 종로 주먹,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이 담겨있다.
- 어제는 아버님이 16살때 고향에서 종의 해방을 시키고 토지개혁을 하고 학교를 세워서 문맹퇴치를 하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서두로 들었습니다. 그후 아버님을 이야기할때 늘 장군,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만주로 가시기 전에도 군(軍)과 관계가 있었습니까?

▲ 광복단 사건이 있었죠. 광복단에서 단장이시던 박선생님은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으시고, 그리고 아버님은 그때 관련되서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을 사셨죠. 사실때 백범 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 들어오셨단 말이야. 백범선생이 지방에서 잡혀가지고. 백범선생이 아버님의 기운에 대해서는 10분의 1이 안된단말이야. 힘이 말이야. 철창을 휘어가지고 다시 오무리는 그런 힘은 백범 선생께는 없었단 말이야. 아마 아버님은 선천적으로 장사신가봐요. 친할머니가 아흔 넷에 돌아가셨는데 키가 6척이세요. 호랑마님으로 동네에 소문이 났는데, 옛날 대가집에는 놋요강 큰 게 있었잖아요. 할머니가 방에서 소변을 보시면 동네 근방 일대에서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하녀들이 와서 ‘마님 소낙비 소리가 나요’하면 할머니가 호령을 치면서 ‘내가 그러니까 좌진이 같은 아들을 낳았지’ 했다고 해요. 사령교를 8명이 메고 다닐 정도였다니까. 역시 할머니가 거창하시니까 아버지와 같이 선천적으로 힘이 센 역사가 나오신거 같아요.

- 아버님 체격은 어떠셨어요?

▲ 제가 만주에 갔을 때 아버님 품에 안겨 자 봤는데, 살이 그렇게 많지 않으세요. 키만 훌쩍 크시고 아령으로 다져진 탱탱한 살입니다. 그 품 안에 몇 달 자 봤는데, 잘 때 항상 총을 지니고 양말, 중국버선을 벗지 않으시고 옷도 벗지 않고 그냥 바지 저고리 차림으로 주무셨어요. 6척 조금 넘으실 겁니다.

- 군관계는 특별히 군리학을 공부하셨다거나 하셨는지?

▲ 아니죠. 그때 홍성에서 나와가지고 한국무관학교가 있었답니다. 고종황제 시절에 한국문관학교,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 육군사관하교 정도 되죠. 거기 교장을 지냈죠. 그때부터 군대 공부를 하셨죠.

- 그래서 어제 토지를 나눠주고 했다고, 16살때 그렇게 하셨다면 그게 을사보호조약 무렵입니다. 노일전쟁이 끝나고, 요 무렵인데, 그때 그런일을 하시고 그 이후에 군관학교 뭐 이렇게 되나요?

▲ 예, 군관학교는 여기와서 22살때였다니까.

- 1910년에 합방이 됐는데, 합방을 겪고...

▲ 그때까지 계속 군관학교일을 하고 계셨죠, 일본이 한국군대를 완전히 무장해제 하기까지 약 7,8년이 걸렸으니까.

- 그러다가 3.1운동 전에 만주로 가게 되는데, 가셔서는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셔서 총사령관을 하시고 그랬다는데. 거기와 관련되는 얘기를 좀...

▲ 처음에 북로군정서를 하신게 아니고, 이시영 부통령께서 만주에다가는 신흥군관학교를 만드셨죠. 여기있는 재산 수만석을 팔아가지고 그때 돈으로 수십만원을 가지고 가서, 그때 수십만원이면 지금 돈으로 수십억입니다. 장백산 안에 치외법권지역에 군관학교를 짓고, 거기에 농사를 짓고 부락을 짓고 그러면서 독립군 장교를 양성했죠. 그때 신흥군관학교 교장을 거기서 하셨죠. 그리고 일본군이 중국대륙을 먹으려고 해서 만주에 관동군 사령부가 생겼죠. 관동군 사령부가 생기니까 그때 장장림이 만주대원수로 있었어요. 자꾸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북만을 중심삼아가지고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을 하셨죠.

- 김장군하면 청산리전투가 무엇보다 첫 손가락에 꼽히겠는데...

▲ 저희 집에 있는 해방직후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보는 자료가 있는데, 거기에 있어서 11년 전쟁동안 오투꼬, 하바라스꼬, 청산리 전투 가운데서 일본군이 2만8000명이 죽었습니다. 거기에는 김좌진이는 어떤 인물이냐 하는것이 죽 나옵니다. 세계1차대전이 끝나가지고 일본이 군축을 했는데 전일본 병력이 공군없고, 해군제외하고 6만밖에 안됩니다. 그때 나남사단- 함경남북도를 포괄하고, 평안남북도는 평안사단이 있었고, 조선군 사령부가 3개 사단이 있었어요. 지금 뭐 1개사단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 3개 사단이면 대단하거든요. 일본이 한국을 집어먹을때 일본 육전대 700명이 와서 먹었으니까. 평양 나남사단이 전멸하니까 나중에 조선군 사령부까지 동원했거든 11년 동안 2만8000명이 전사한것이 약 5개 사단 병력이 없어진것이지요.

- 그런것과 관련된 일화는 없나요?

▲ 아버님과 관련된 것은 다 잘아는데, 한가지 중요한 것, 우리 국민이 알아야할 것이 무엇이냐면 대개 공산주의가 8월 15일부터 나타난 줄 아시는데 그게 아닙니다. 마지막 싸움인 청산리전투에서 일본이 대패하지 않았어요? 그때 일본사람들이 장장림이 한테 협박을 해가지고 아버님 독립군을 포로로 잡아갔어요. 2개 사단 병력이. 그러니까 아버님 소만국경을 넘어 흑하라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 흑하라는 곳이 대단합니다. 그 직전에 러시아 혁명이 있으면서 레닌이 정권을 잡았을때 소만국경을 중심으로 만주에 극동 공산당 본부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아버님이 쫓겨가니까 소련공산당에서 하는 말이 적군(赤軍)이 하는말이 "우리하고 손잡자 당신의 전쟁기록을 알고 있으니, 우리가 돈과 무기를 대 줄테니 러시아혁명을 완수해서 일본과 만주 조선을 적화시키는데 극동책임자를 당신이 해라" 고 했습니다.

아버님이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일본제국주의가 싫다고 했는데 소련이라고 하는 것은 소련연방 노릇을 하라고 하니 조그만 상전 때리고 큰 상전 모시라니 완전한 자주독립이아니라 남의 앞잡이를 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독립을 해 놓고 그걸 우리 백성에게 물어봐야지 우리가 공산당을 하고 민주주의를 하고 하는것은 결정할 수 없고 다만 독립운동에 대한 자금과 무기만 대달라고 해서 결렬이 됐고 이걸 더 뒀다가는 큰일 나겠다. 이래서 밤에 5000여명을 둘러싸고 기관총으로 난사를 해버렸어요 그때 살아난 사람이 아버님하고 오광선 장군, 이청천 장군 불과 10여명만이고 7~8천명이 다 몰살당했어요, 이게 흑하참변이라는 거에요. 공산당이라는 것이 그만큼 자주독립전선에서 독립을 부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입력일 : 2007.03.19)
프로그램 리스트보기

(주)동아닷컴의 모든 콘텐츠를 커뮤니티, 카페, 블로그 등에서 무단사용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저촉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by donga.com. email : newsro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