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인 이야기 첫 번째로 김두한 선생을 모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김선생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인 플러스 알파의 그런 분이십니다. 특히 다른 경우와 다르게 제가 느끼기로 김선생님 자신도 자신이려니와 아버님 백야 김좌진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부터 하시고, 그리고 걸어온 길을 들었으면 합니다. 김좌진 장군은 기록에 의하면 1889년생으로 말하자면 강화조약에서 10여년 뒤, 이승만 박사보다 15살쯤 뒵니다. 1929년 젊은 나이에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셨죠. 그 40살정도의 생애지만 많은 일들을 하셨는데 아드님은 어떻게 보시는 말씀해주십시오. 선생님 태어나신게 1918년, 삼일운동 한해 전인데, 아버님이 떠나신게 바로 그 해 정도지요?
▲ 제가 1918년 음력 5월15일생으로 3·1운동 전에 태어났는데, 아버님이 만주로 떠나신 게 3·1운동 전 해라고 하니까 만 한 살 전입니다.
─ 그때 기억이 납니까. 한 살이면 기억이 있을 리 없는데.
▲ 여섯살 적에 아버님이 아들이 하나라 보고 싶다고 하셔서 지금의 속초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생선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어요. 도착하니 독립군들이 마중나와서 목단강 쪽으로 안내해서 아버님을 상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이범석 장군도 계셨어요.
─ 1920년에 청산리 싸움이 있었죠. 1925년 호림(虎林, 중국 후린)에서 다시 한번 (항전을) 하려 했던 기록도 있는데. 그 사이니까 그때 어떠셨어요?
▲ 내가 어머니께 아버님 어디가셨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늘 아버님이 독립대장인데 일본놈과 전쟁하러 갔다고, 우리나라가 독립하면 곧 돌아온다고 했죠. 품 안에서 항상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 형제분은 단 한분이십니까?
▲ 00이라고 배다른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중국에서 난 동생이죠.
─ 그분은 지금 어디에?
▲ 지금 아현동에서 살지요.
─ 홍성에서 아버님이 사립학교를 만들어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는데…
▲ 아버님이 충남 홍성 갈산에서 태어나셨는데 호명학교를 만드신 열여섯살 무렵에는 3천석 부자였다고 해요. 할아버진 안계시고, 지금으로 치면 1만석 정도 되는 부자니까 대단한 갑부였죠. 밭도 수만 평, 어선도 30여 척이나 있었죠. 갈산 집이 아흔아홉칸 짜리였어요. 이때 종문서를 모두 벽장에서 꺼내 종들을 방면하셨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대단히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홍성에서 유명한 관상쟁이를 아버님이 돈으로 매수해서 ‘우리집에 와서 내가 시킨 대로 얘기하라’고 했답니다. 소문난 관상쟁이가 오자 홀몸이었던 할머니는 집으로 불러들여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그 앞을 어슬렁거리니 관상쟁이가 할머니에게 ‘저분이 누구냐’고 물었고, 할머니가 둘째 아들이라고 하니, 우리 아버님은 삼형제였죠.
저희 큰아버지는 고종 황제의 따님 세분 중 큰 딸과 결혼한 부마였지요. 그리고 막내가 김동진씨라고 있죠. 관상쟁이가 무릎을 탁 치며 ‘어허 훌륭한 일을 할 분인데 큰 액운이 있다’고 했죠.
자 그러니 할머님이 큰일인거야, 큰아들은 부마로 빼앗겼는데 둘째마저 액운이 있다니. 안달이 난 할머니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물은 것은 당연한 얘기고. 그러자 관상쟁이는 액운을 떼줘야 하는데,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려야 하니까 기도를 드리는 동안 누가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잡귀가 유혹하는 거니까 절대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마곡사로 백일 불공을 드리러 간 사이 아버님은 청지기를 불러 벽장 속에 있는 논 문서며 밭 문서, 어선 문서를 가지고 나오게 한 뒤 종 2백여 명을 마당에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하셨죠.
그때 아버님은 대단했거든요,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부릴 수는 없고, 짐승이 아닌 이상 지금부터 논 문서 밭 문서 어선 문서 전부 나눠 갖고 종 문서는 여기서 불을 지를테니, 그대들은 문서를 가지고 가라"며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아흔아홉칸짜리 집을 때려 부수어 호명학교를 만들고 우리집은 건너편 큰 초가집으로 이사했습니다.’가족이 먹고 살 백 석만 남기고요.
(입력일 : 200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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