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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윤보선 편 - 제5회 젊었을때 얘기
윤보선 편
제5회 젊었을때 얘기
1966.01.14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음악)

이 시간에는 전 대통령 윤보선 씨와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 권오규 씨의 대담으로 보내드립니다.

(음악)

- 이런 이야기가 있죠? 에, 정치를 하는 정치장인이라고 그럴까요. 정치장인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마, 이런 얘기가 있는데 오늘은 정치가 이 선생의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이야기, 마, 그거만은 물론 아니고 그것을 해위 선생의 젊으실 때의 체험이랄까. 이런 것을 통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섞어서 얘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근데 제가 알기로 에... 3.1운동 전에, 전입니까. 상해에

얼마 동안 망명을 하신 일이 있다고 듣고 있는데 그때부터 이야기를 좀 해주십쇼.

- 예, 내가 젊었을 적에, 에, 여기 일, 한일합방이 되고 인저, 조금 지각이 나기 시작할 적에, 에

이 아시아에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은 중국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손문 씨, 손일선 씨를 중심으로 한

중국 청초를, 부패한 청조를 타도하는 혁명이-.

- 신해혁명이요.

- 신해혁명이죠.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 혁명이 일어났을 적에 나는 그날그날 신문을

보는 것이 말이지. 그 기대와 기쁨을 아... 금할 수가 없었어. 곧 내가 중국을 가서 중국 그, 손일선 혁명에

투입을 하고 싶은 생각이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 예.

- 근데 이제 나는 중국으로 갔던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공부를 하러 갔던 거죠.

- 네, 원정-.

- 네, 일본으로 원정 공부를 하러 갔는데, 일본 가서도 내 마음은 중국에 있는 우리 혁명가들,

그들한테 내 마음은 가 있었습니다. 나도 하루속히 저들한테 가서 혁명을 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일념으로 일본에 약 이 해 반 동안

있는 동안에 에-, 아무래도 내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어서 집으로 나왔습니다. 나와서 어... 중국을

갈 계획을 하고 있는데 한번은 들으니까 몽양 여운형 씨가 그때 상해에 있었는데 여길 댕기러 나왔어.

그 나하고 몽양 여운형 씨하고는 구면이 없는 처지지만은 그 얘기를 듣고 그 사람을 찾아서 인사를 하고

내 그 얘기를 했더니 에, 대단히 환영을 하고 어, 같이 가기를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 나이가 그때 어떻게 되셨죠?

- 내가 아마 그때 스무 살 될 때였습니다.

- 네.

- 아, 그래서, 어, 나는 어, 몽양하고 같이 그렇게 상해를 가는데 마침 그때 상해를 가서

얼마 안 돼가지고 세계 제1차 대전이 끝이 났습니다.

- 네.

- 인제-.

- 3.1운동 전이군요.

- 어, 그러니까, 에, 내가 상해를 특별히 갈라고 그런 것은 그때 우리 독립운동자 혁명지사들이

에, 이 아시아지역의 서백리 하를 위시해서 만주, 혹 중국으로 북경, 상해 이렇게 대개 나눠있었습니다.

그런데 상해를 내가 특별히 택한 것은 그때 손문 씨가 혁명을 실패를 하고 그... 손문 망명 혁명가들이

전부 상해에 와 있었어. 그래서 내 생각에는 우리의 친구는 이... 이... 이, 중국의 혁명한 손문 씨

일파다. 그들하고 손을 잡아야 되겄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 이, 독립도 오.... 에... 희망이 있겄다 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 세계를 다 돌아다본대도 우리하고 같이 이, 참, 동조할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있다면은 오직 중국의 혁명가 손문 일파밖에는 없다고 봐서. 그래, 상해를 갔더니 지금 말한 것 같이

에, 제1차 대전이 끝이 날 그 무렵에 에, 저, 상해에 있는 독립운동자, 또 중국 각지에 있는 독립운동자도

오, 지금, 이 세계대전이 인제 끝나는 걸 계기로 해가지고 우리나라 일과 아... 어떤 결부를 시키기 위해서

상해로 하나씩, 둘씩 모여들어.

- 네.

- 그래서 그때에 인저 어... 각 지방에서 어... 모여드는 이들이 많아서 의연히 상해가 독립운동가의

또 혁명가의 중심지가 같이 이렇게 되어졌습니다.

- 네.

- 그러다가 여기서 우리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으니까 이... 파리시에서 강화운동을 하는데 거기에 우리 대표를

보내자, 이렇게 얘기가 돼가지고 그때 김규식 씨를 우리가 대표로다가 아... 뭣이지...

- 네.

- 파리시를 보냈습니다.

- 네.

- 그 후에 인저 여기 임시정부가 상해에 서고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으로 추대가 되고 또 이기붕 씨가 국무총리가 되고

이래서, 거기, 에... 다른 분들, 여기 부통령을 지냈던 이시영 씨라든지, 그 외에 이동녕 씨라든지 신규식 씨라든지,

안창호 씨라든지 여러분들이 모두 그리로 모여들었습니다. 아... 그러다가 아, 저, 이 박사, 이승만 씨는 어,

하와이에 그때 있었는데.

- 네.

- 에...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있은지 그게 1년 만인지 내가 연안 시각은... 모르... 기억이 안 납니다만. 어... 상해로 왔어.

상해로 왔는데 상해로 오면은 이승만 씨가 아마, 생각에 자기가 대통령으로 됐으니까 큰 환영을 받을 줄 알았는데

반대로 그때 환영을 못 받게 됐습니다. 상해에서 반대들이 일어나고 해가지고 어... 이승만 씨가 아... 그 어떤 선교사 집에

가만히 숨어 있었지. 그러다가 저... 외, 외, 외부 사람들하고 우리나라 사람들하고 접촉이 별로 없었고 했는데-

날 보고 독립자금을 좀 마련해라.

- 아, 이 박사가-.

- 이 박사가 그래서 내가 그때 비밀히 에... 에... 중국 사람으로 가장하고 일본까지 내가 왔던 것입니다.

와서 독립자금을 좀 마련해가지고 다시 상해로 갔었는데 그때 상해는 의연히 적은 한국인데 여기로 말하면은 본국서

3.1운동, 독립운동을 하다가 오던... 아... 모든 훌륭한 남녀가 모여들어서 법조계는 의연히 소한국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고

또 불란서 쪽이니만큼 불란서 사람들이 우리 한국 사람들한테 특별히 동정을 해줘서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 그때도 상해로 젊은이들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죠.

- 네.

- 그리고 여기 기미독립운동이 시작된 이후로 왔는데 그때 인저 우리는 어떻게든지 이 임시정부를 주도를 해가지고

그때 참 우리는 상해를 임시정부라고도 하고 한성정부라고도 했습니다. 인제 본국을 버젓이 들어올 그런 기대를 했고

특히 나 같은 사람은 나도 어렵고 또 이, 젊은이들도 그런 기백과 어떻게든지 목숨을 내놓고 자유를 찾아야 되겠다-.

나라가 독립을 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그, 참, 독립과 나라를 잃은 젊은 청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애국심과 기백이 말이지.

그... 젊은이 하나하나의 가슴에 터지고도 넘쳤던 것입니다. 아, 그래서 거기 온 젊은이들로 말할 것 같으면

무슨 방면에서 일을 하든지 어떤 사람을 폭탄을 제조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인제 국내로 들어와서

독립자금을 마련하다가 왜경에 붙잡혀서 갖은 고초를 다 당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를 지냈습니다.

어, 내가 오늘도 그, 그려온 것은 우리 대한민국 청년들이 에, 그 정신을 그대로 지금 본받아서 이, 애국열에 불타는

이 나라를 지금, 우리가 독립국이라고 가지고 있지마는 이 후진성을 면하고 이 나라를 훌륭한 나라로 만드는 데

있어서는 우리가 다시 한 번, 그때 상해에 왔던 우리 젊은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되겠다.

- 네, 그, 젊으실 때 이야기 재밌었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더 들었으면 합니다마는 또 다음에.

(입력일 : 201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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