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저께까지는 15년 전 6·25때 남하 하느라고 고생 야단치던 얘기를 쭉 듣고 있습니다만 남하 할때 그 이제 정부가 대구로 부산으로 이렇게 피난한 것도 그야말로 무질서 했고 갈팡질팡 했지만 또 그 6·25사변 저 뒤에 저 9·28 수복 후 겨울에 소위 1·4후퇴 당시에 이제 그 장병들이 국민방위 ...
-네
-그 뭡니까, 제2국민병 으로써 이제 내려가다가 뭐 그 혼란 또 이루 말할 수 없는데요.
-네
-오늘은 이의원 저 제2국민병, 나중에 이제 국민방위군이 됐죠? 그 사건 어마어마한 사건이 참 기억에도 새롭습니다만 지금 30 넘은 분들은 아마 그때의 기억이 좀 나..다소라도 남지만 또 젊은 사람들같은 사람은 아마 생무지로 처음듣는 얘길 거에요.
-네
-그때 얘기를 좀 한번 이의원 기억을 되살려서
-그 말씀을 듣고 말씀할라니 좀 가슴이 아프고 회상하자니 소름이 끼치는 것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몇 번 없는 비극이죠?
-예
-역사상.
-특히 건국 초에 우리나라 한국의 청년운동에 축척한 공로는 자타가 다 공인하지만 이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말미암아 남겨 논 청년운동사의 오점이란건 씻을 수가 없고 앞에 나가는 청년운동의 방향까지도 막아버리고 말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죠, 그 후에 청년운동이라는게 삭 사그라버리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네
-그게 첫번에 이 사건이 나기 전에는 이박사가 청년단을 통합해라 해서 각 단체가 통합하는 과정에 이범석 씨가 주정이 되는 청년과 국방세력을 신성모 씨로 대체하는 과정에 있던 것은 저번에 말씀 드렸습니다.
-네 그랬구요.
-그래서 그 다음에 이제 거물 각 청년단 지도자들을 전부 지도위원으로 한산한 자리로 올려놓고
-음
-그 김윤근 씨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신성모 씨와는 참 친부자 지간의 정으로써 이걸 맺어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김윤근 씨가 그때 군대에 있었나요?
-그때 한청감찰국장이 되었다가 그 다음에 신성모 씨가 국방장관 되면서 한청단장서리를 시켰습니다.
-이거 뭐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죠?
-예 그 뭐 가정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그런 말 들었습니다. 또 우리는 신성모 씨에 대해서 전혀 몰르고 신성모 씨가 특히 이런 중대한 과오를 범하게 된 것도 국내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이라 하는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뭐 마도로스로 쭉 있다가 별안간 돌아와가지고 청년운동이라는게 좀
-네 그래서 이 국민방위군사건은 당시 6·25사변이 나니깐
-네
-이 군부가 저렇게 흩어지고 군부자체에 저렇게 수습하기도 벅차니 이 현대전에 있어서 특히 이 인해전술에 있어서 대비하는데 있어서가지고 인적소모를 어떻게 보충하느냐.
-음
-하는 문제는 제 2 국민병을 이렇게 훈련양성해서 보충해야겠다. 특히 이 신부장이 말씀한 바와 같이 그 1·4후퇴 때에 이 장병들의 인적자원을 어떻게 소비하느냐, 물적자원은 소비할 수가 있지만 사람은 어떻게 다루느냐. 그런문제는 당시 국회에서도 중대한 문제가 되었고 의당 그건 국회에서 논의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전 까지는 한청이란 그것이 청년방위대라는 사설기관같은 그런 입장에서 그 방위지원에 대한 그 임무를 청년운동회 임무를 하니라고 해서 부작용이 많이 나니깐
-그렇죠. 그때 제 기억에도 뭐 향토방위대...
-향토방위대는 경찰에서 관계하는 보조기관이고
-아 그거하곤 다른가요?
-청년방위대는 군을 보조하는 기관이에요.
-아 그래요. 뭐 방위대가 두개가 있었죠.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법적 근거가 없이 나가노면은 불법행위가 자꾸 나오고 인권을 어떻게 멋대로 징발하고 징역할 수가 없다.
-네
-국회에서 방위군사건에 대한 예비를 주기위해서 200억이라는 돈을 예산을 통과시켰습니다.
-아, 국민방위군 편성을 위해서?
-예
-그리고 1950년 12월 21일인가 제 기억으론 그때 국민방위군법을 설치했습니다.
-그렇죠. 그게 12월 21일날 국회 통과를 받았군요.
-네 그래서 그건 1·4후퇴 때에 후송하는 국민방위군을 후송 시키고 또 이걸 훈련소를 만들어서 신병 훈련을 시키고 또 장정대기소를 만들고 막대한 임무를 이 대한 청년단에 맡겼어요.
-그게 그러니까 그 법이 결국 그 청년단 간부들 몇몇 분이 급조한거 아니겠어요?
-그렇지요. 근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국회가 6·25사변을 맞이하게 되니깐 그걸 있어야만 하겠다는 필연적인 단계에 청년단 출신 국회의원 한 11명이 있었습니다.
-네
-그분들이 주정이 된건 사실이에요.
-아
-그러나 그 당시에는 당연히 해야 할 법이라고 생각이 되고 나부터는 그때는 그거 있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한 사람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거는 그 운영에 문제가 있었어요.
-그렇죠. 12월 24일날 흥남 철수를 했으니까
-네
-이게 12월 21일날 결국 국회에 의해서 국민방위군법이 통과를 했으니까 아마 고때 아마 위급한 시기니까 뭐 당연했을 거죠.
-네 그래서 그 후퇴할 때에 이제 그 서로 분담해가지고 일을 하는데 거기에 이제 패단이 생기는 이유가 지금 이제 우리가 검토를 쭉 군사학적으로 검토할 여지가 많이 있지만 특히 한청간부란 사람들이 군사훈련이 거의 없던 사람들이
-그렇죠.
-전부 별안간 대령도 되고 중령도 되고 방위대령 뭐 방위 뭔 계급을 다 해줬어요.
-뭐 청방대령 청방소령 그런거...
-그거 해줬습니다.
-네
-그리고 김윤근 씨네 몇 몇 최고간부는 바로 육군중장 육군대령 이런 직을 줬어요.
-그건 아마 현역대로 계급...
-계급 줬습니다.
-네
-그러니 그 현역의 대령이나 중장 될라면 상당한 교육과 훈련이 없어가지고는 안되는데
-그렇죠.
-그 분들로 하여금 칠십만이라는 숫자를 동원해서 그걸 관리하라 그랬으니, 사실 명단에 올른걸 보건사회부에서 등록한것 만으로도 오십만은 된다 그럽니다.
-에
-그러면 그 당시 법에 17세 에서부터 에..40세 까지입니다.
-그렇죠. 음
-그러면 내가 왜 이 얘길 하냐면 제가 아까 신부장이 얘기했지만은 31세 한 십..오륙년 전이니까 십 사년이나 한 오륙년 전 아니겠어요? 지금으로부터?
-그렇죠.
-그러면 31세에서 54세 까지들은 제 2 국민병은 전부 여기 해당자가 된다는 말이요.
-그렇죠.
-그러면 부용별...그 가족 처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면 참 심각한 국민적인 문제 아니겠습니까?
-네
-이것이 잘못 다뤄지기 때문에 이게 하나의 큰 파동에 문제가 됐다. 그래서 이것은 지금 에..아마 지금 54세 된 분들은 손자 본 사람도 있을것입니다만은
-그렇죠.
-지금 기억이 새롭습니다.
-네
-그래서 그런것이 자꾸 이제 문제가 될때에 국회에서 라든지 이런데에서 문제가 심각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 이런것은 결국 정치파동의 하나의 그 전야제적 사건이 되버렸습니다. 거창사건과 더불어
-그렇죠. 아마 가까운 원인이 됐죠. 하나의
-다시말해 누가 말한것은 직접원인이라고
-네
-그런게 결국은 소수의 그 세력이 자기세력으로 확장한다던지 정치적 구경을 할때에 그걸 방지할라는 또 정당한 세력이 있어가지고 충돌이 파동을 일으키는거 아니겠습니까? 뭐든지?
-그렇죠.
-이제 그래서 이러한 그 문제가 자꾸 나오기 시작하는데 특히 국민방위군사건에 있어서 이박사가 중심이 되어서 신성모 퇴세를 완전히 그때 갖추어지는 겁니다.
-음
-어떻게 해서 갖추어 지느냐. 신성모 씨가 국무총리 서리인가 하고 있었어요.
-그랬죠.
-그리고 또 국방장관을 겸했습니다.
-네
-또 김윤근 씨는 대한청년단 단장이고
-네
-동시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겸했습니다.
-네
-또 육군참모총장에 정일권 씨 입니다.
-네
-또 그 다음에 치한국장에 김태선 씨 입니다.
-네
-또 경무대에 당시 비서실장이 김광섭 씨 십니다.
-네 시인했던 분...
-김광섭 씨.
-네 네
-그분들이 신성모 씨 중심은 아주 메인 트라스트들이에요.
-아
-완전히 짜가지고 밀고 나가던거입니다.
-더구나 그때 6.25사변이 되기 때문에 대단히 그 어려운 형편에 있었던 것만은 우리가 부인 할 수가 없다.
-네 그래서 그 정말 그 수많은 장정들을 이끌고 이제 엄동설한에 내려가서 그야말로 고생 진탕하고 이러는데,그게 맨 첫번에 터지기 시작한게 어느때...언제부터 였죠?
-그러니까 그것이 이제 터지게 되는것이 1951년 한 이게 한 3월 2월...
-2월 달
-그때 쯤 이제 국회에서 문제가 되고 에.. 각 처에서 이제 부작용이 나가지고
-그랬죠.
-여기저기서 죽는다 뭐 심지어 지금 내가 강조하고 회상하는 것은 당시에 첫번의 국민방위군 그 장정들을 소집해서 후송할 때는
-네
-합바지 이 행렬이라 그랬습니다.
-그랬죠.
-하하하 합바지들이 쭉 걸어가는 행렬이요.
-정말 전부..저도 그때 내려갔었어요. 그 걸어서 말이죠. 그 구미 대구 밑에 구미까지 내려갔는데 전부 그 흰바지 저고리 입은 사람들이 그 봇짐 지고 말이죠.
-네
-기냥 마냥 내려가는...
-순진한 합바지 부대들이 이제 걸어가고
-네
-중간에는
-네
-죽음의 이제 그 행렬이라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끝에 국민방위군 말기에 이제 해산되서 갈때는 거기에 이제 해골의 행렬이라 그랬습니다.
-하하
-그래서 참 부령들을 전부가 부령들은 전부가 그 국민방위군..한테 기대해 봤는데 총 한자루 잡아본 일도 없고 총 한번도 제대로 싸움 해본 일도 없고 부고장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것도 확인도 못하고 그냥 희생자가 한 둘이 아닌 그런 비상한 사태가 일어났다. 그래서 그때 경주, 울산, 마산, 김해 이런데 그 장정 그 신병 훈련소, 교육대 이걸 많이 장치해 두고 또 전세에 따라서 방위군의 그 예비병력을 이리 이동하고 저리 이동하고 하는데 주의할 수 있는 세력이 확고하게 준비가 안됐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나서 부산에 이제 국회의원들이 다시 와가지고 국회를 이제 그 당시까지는 국회의원들이 그 정부에 맡기고 나갔는데 부산에 와서 쪼금 전세가 미군이 자꾸 들어오고 안정되니깐 국회간도 또 파벌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네
-거기에서 이제 이 문제가 들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숨 돌리자 인제 싹이 트기 시작한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근데 그저 사건이 결국 터지기 시작한 결...그 경위라던가 이런 얘기 뭐 오늘 시간이 다 됐으니깐 내일 듣기로 하구요.
-네
-이..이 의원이 그때 저 부산에 뭐 하고 계셨던가...
-그때는 나는 뭐 5.30측에 나가서 낙선하고 와서 부산에서 이제 피난하고 저번에 구국연맹이라고 조박사하고 같이 활동을 하고 댕겼죠.
-그러면 저 그때의 제 2 국민병 그 행렬엔 끼지 않았겠군요?
-나는 나이가 좀 그랬..빠졌고 학동의원군 관계의 지위관계로
-경험하셨..전 경험을 했었으니까...내일은 그 실지 경험했던 제 얘기랑 섞어가면서 좀 듣기로 합시다.
-예
(입력일 : 200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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