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20년간 흘러간 역사의 물결속에 숨겨진 새얘기를 다시 찾아보는 정계야화. 오늘도 역시 전 민의원이였던 이철승씨와 신동준 동아일보 정치부장의 얘기를 들으시겠습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1946년 5월 6일날 첫 회합을 열고 에 처음에는 사흘 후엔가 그냥 결렬이 되고 말았죠? 그래서 소련대표가 도로 ..으로 가버리고 2차가 이제 그 이듬해 47년 6월 7일날 역시 덕수궁에서 열렸는데 그때 이제 가장 큰 문제가 미소공동위원회 자문에 응할 그 남북한의 그 정당대표. 사회단체 대표들을 이제 수를 측정하는데 있어서 남한에선 무려 425단체나 됐는데 북한에선 38단체 밖에 안되서 그래서 이제 미,소양국간에 옥신각신이 벌어졌고 이런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거이 거적적인 반탁운동이 전개되고 이런 판이였는데 고때 당시의 상황을 좀 얘길 해주시면서 그때 얽힌 또 재밌는 얘기를 들려주세요. -예 그래서 그..전쟁에는 군인들이 용감하고 전쟁에 이기고 또 정치에 지는 수가 있다하는것이 오늘 국제정치에서 미국사람과 소련사람 그 당시 전후 처리문제, 정치문제에 있어서 큰 실패를 했다하는 얘기를 많이 논의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제 델레스 같은 사람들도 군인이 이..정치나 외교하기는 퍽 외로운 것이다. 하는 얘기를 자기 회고록에 쓴 일이 있습니다. 그 한 희생물로 되있는게 우리 한국의 3.8선이요, 신탁통치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건 미국사람이나 소련사람이 4개국 관리밑에서 에 한국을 관리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해준다. -그건 5년인가 하는 기한이 있었죠? -그래요 5년간...우리가 말하면 ..을 든다. 그럴때 한국사람의 참 김구선생이나 이승만박사같은 그런 위대한 우리 혁명선배들의 노고도 있었고 국내외 많은 동포들이 36년간 저항투쟁도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생의 댓가로써 우리가 해방이 됐다고 하지만은 실제 국제 힘에 있어서는 미소 양군이 딱 두동강이를 나눠놓고 눌르고 있는데 우리가 반탁운동 해가지고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 않겠느냐. 이렇게 싱겁게 간단하게 외국사람들을 보고 미소공동회를 여는것으로 나는 보고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민의에 총 단결에 결산으로써 우리운명을 개척해 나갔다는 한 증거의 하나의 큰 사건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는데 -그때의 그 거적적인 참 반탁운동이 벌어지지 않았던들 말이죠. -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또 무슨 결정만 내려지게 되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또 다른 방향으로 엉뚱하게 퍼져나갔을지 모르겠네요. -그렇습니다. 일본사람 세상도 우리가 살아왔고 우리나라에서 독재나 뭐 정권다툼 세상도 살아왔지만 한번 강권을 가지고 내리 누를라그러면 어떻게 이길 도리가 없지 않던가요? -그 그때 그 학생들이 이제 상당히 데모에 그 선봉이였는데 3.1운동때도 그렇고 그 후에 4.19때도 그렇긴 합니다만 그때 인제 이의원이 학생...그 연맹 -네 -그러니까 학년에 이제 위원장으로써 어저께 얘기나온 덕수궁앞 대데모를 벌리고 -네 -그리고 나서 인제 어떻게 됐어요? 고 직후에 -그러니깐 이제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줄거리는 이거 하나 특별히 말씀하고 싶어서 앞으로 우리가 도움되는 얘기고 이걸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이 있더라 하는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건 뭔 말이냐. 전투에 있어서는 강경책만 가지고도 안되고 또 완화책만 가지고도 안되고 화정야행이란 말씀을 조병욱박사도 많이 쓰고 또 이 탄력있게 문제를 처리할 줄 알아야한다. -음 -이런면에 있어서 제가 지금도 많은 문제를 봉착했을 때에 한 저의 존경하는 인물로써 상기하는 분이 하나 있는..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분명히 장덕수 선생님입니다. -네 -여러분 설산 장덕수선생 잘 아실겁니다. -뭐 전 잘은 모릅니다만 그때 한민당 정치부장이였죠? -네 그랬습니다. -네 -그분은 이제 보성전문 댕길때에 그 외로울때 일제말기에 학생감을 했어요. -아 -매일 학생들이 동대문경찰서에 한 대여섯명씩 끌려가면 그 어른이 그 일을 맡을 양반이 아닌데 -네 -그 치닥거리를 전부 인촌선생 대신 다 한 분입니다. -아 -그래서 일제말기를 그 위기를 극복하게 된것도 인촌선생의 참 일선 실천하는 분으로써 장덕수씨의 보좌가 있었고 한민당 역시 그 사람은 많이 모이고 기분은 컸지만은 역시 일꾼은 장덕수선생이다. 그 어떻게 그렇게 뼈저리게 느꼈느냐. -네 -반탁투기가 생겨서 김구선생과 이박사와 한민당과 그 관계를 잘 누비고 이 단계를 식히고 끌고 나가는데 역활 한 분이 장덕수선생이였습니다. -아 그때만하더라도 이박사하고 진구주석하는 사이에 이제 미묘한 그... -미묘한 것이죠. -갈등이 있었죠. -왜 그러냐면 인정요인들은 보따리가 많은데 -네 -들어오시다가 반은 좌익으로 가고 또 국내부터 보따리가 걸러지고 -네 -국내의 기반이 없고 -네 -이박사는 고집, 아주불통이신 양반이고 단초로웠지만은 -네 -또 한민당은 국내파로써 -예 -이분들을 어떻게 영수로 모시고 자기들 의사를 끌고 나가려니 에 장덕수 설산(雪山)선생같은 그 역활이 특히 이제 군정에 있는 경무부장 조병욱박사와 좋은 그 발란스가 되어가지고 그 이걸 끌고 나가는데 에 한참 미소공동위원회가 제일 문제 삼는것이 우리 정부를 수립하는데 과도정부를 수립하는데 협의대상으로써 그 사회단체 정당단체 대표를 이 참가시켜야될것 아니냐 이것이 막부삼상회의 결정인 모양이니까. -네 -그게 소련에서는 막부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참가시켜야하겄다. 또 미국서는 소련도 그랬지만은 막부삼상회결정이 나오자마자 바로 전 좌익하고 우익하고 합쳐서 전 민족이 반탁을 해버렸으니 제가 벽두에 말씀한바와같이 미국 소련이 생각도 않던 일이거든 이게... -네 -그러니 이 반탁을 한 사람을 받아들이자니 그렇고 안받아들이자니 민주주의 원칙에 위반되고 그래 미국 그 고민속에 딜레마에 빠져가지고 있을때 소련은 그 약점을 가지고 왜 소련이 그러냐. 그때는 4개국 관리라면 중국이 장계석씨가 있을때입니다. -그렇죠. -영국이 있습니다. 미국이 있습니다. -네 -소련은 이걸 어떡하든 신탁통치를 끌고 가야만 발판을 거둬가지고 시간을 벌으면은 자기들이 이 적화할 수 있는 단계가 오지않느냐. 지금 이걸 정부를 세워놓면은 그 서방측한때 뺏긴다. -네 -이것이 소련의 아주 역대에 내려오는 전투적인 작전이고 구랍파에서도 전후처리 문제에 있어서 동구랍파를 미국사람이 숯되게 해가지고 다 먹히지않았습니까? 이제 그런 문제가 있어서 반탁하는 단체는 안된다. 그러니깐 이쪽에서도 그 말하기는 하치중장이라던지 브라운소장 미국대표들은 어떻게해서 그 ..을 뺄수가 있느냐 그래 반탁찬탁을 과하게 한것은 공산당도 반탁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그걸 빼고 막부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사람을 집어넣으면 되지않느냐. 그러니까 소련에서도 그 서약이라면 좋다 해가지고 결국 미소공동위원회 5호성명이란게 났어요. -그랬죠. -그 5호성명이라는건 막부삼상회에 그 정책을 지지하는 단체..대표는 우리가 회비대상으로 삼을수가 있다. -음. -그래서 그걸하기로 했는데 나중 김규식박사나 몇 분이 이렇게 참가해 들어올줄 알았어요. 소련에서는 -네 -그랬더니 그분은 좋은줄 알았더니 나중에와서 별안간 우익단체에 자기들이 반대하는 반탁하는 단체가 전부다 들어오게 됐단 말이야. -그렇죠. 그게 기묘한 그 작전이였죠. -네 -그러니까 소련에서는 나중에 보고 이건 반동단체들 뿐이니까 이건 할수가 없다. -네 -그 이면에 어떻게 됐냐. 우리가 이 문제를 가지고 미소공동위원회 회비대상으로 들어가야 할거냐. -네 -안들어가야 할거냐. 이 문제는 대단히 심각했습니다. -네 -밤을 새고 이것가지고 며칠 토론했습니다. -네 -그땐 흔히 과격한 사람들이... -강제.. -어어 그걸..이것도 해야한다. -그랬죠. -이런 입장을 에..하기때문에 안들어가기로 우리가 하는 대세가 많이 있었는데 장덕수씨가 댕기면서 김구선생 만나고 이박사 만나고 우리 청년단체 연합 애국단체 연합회 대표를 만나더니 만일 안들어가면 완전히 공산당들만 들어와가지고 회비대상들면 우리가 무슨 힘으로 자주독립한다고 정부를 세울수가 있소. 그러니 어떻게든지 우리가 하치나 미국사람들은 민주주의원칙을 말이예요, 근본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그..를 가지고 있는 그..사회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에 우리가 첫번에 막부삼상회 결정을 지지한다고 해도 반탁의사표시를 거기 들어가서 해야할거 아니겠소. -네 -이것이 화전야행이란 말이 거기서 이제 확실히 실천으로써 체험하던 것입니다. -그게 장덕수씨께서 어떻게 어떤방법으로 이제 회유책을 설득하셨어요? -네 ..공산당에서는 단체를 전부 집천하면 전부가 좌익일색이니깐 그 뭐 어떤 ..든지 하는데 이북에서는 아까 신부장이 말씀한바와같이... -서른여덟... -서른여덟 단체를 냈는데 전부가 좌익단체고 우익에서는 425단체를 냈는데 소련스티코포가 조사해보니깐 3개밖에 진보단체가 없다. 좌익단체고 진보단체가 전부 이거 반동문제다. -네 -이렇게 말을 했는데 우리는 급조적으로 할수없이 단체 있는데는 다 막라했지요. 지방에 전보치고 ...고 그래가지고 결국은 어느단체가 호알..이다..어느단체가 호알..이다 하니깐 그 단체수가 인구수로 말이요? 우리 삼천만이면 남한이 이천만밖에 안되는데 이천만에 한 사천만 이상되는 인구가 병합을했어요. -그런공작을 결국 장덕수씨께서... -장덕수씨가 주로 말이요 설득해서 이박사도 긴가민가 대단히 이 장덕수씨에 대해서 걱정을 하셨어요. -음 -또 인정요인중에서도 과격파들은 이 장덕수가 이 정치를 너무나 하니깐 믿을수가 없다 해가지고 그때부터 실행한 그 개항이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장덕수씨께서 12월달인가 이제 암살당하셨는데 그때부터 무슨 그러한 미묘한 움직임이 있었던가요? -그래 장덕수씨가 그걸 내놓고 우리가 결국가서는 미소공동위원회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네 -그것이 미소공동위원회 결의하고 스티코포가 보따리 싸가지고 간 동기가 되버렸어요. -그렇죠. -그것이 오늘날 유엔총회에서 우리 한국문제를 다루게 됐는데 그 문제후에 2주일 후에 장덕수씨가 한독당에 김석한씨의 사수로 놀던 젊은 박광옥이란 사람이 장덕수씨를 살해했습니다. 비참하게도 우리는 이런 중대한 사건이 있으면 역사를 돌이켜볼때에 좌우합작문제될때 요은영씨가 돌아가셨고 -그랬죠. -그 댓가로...또 남북협상때에 김구선생이 갔다오셔서 거의 돌아가신거나 다름없고 미소공동위원회결의가 결렬시켜가지고 결국 대한민국이 유엔의 결의를 받아...지지를 받게고롬하는데 그 장덕수씨가 그 댓가로 제물이 되지 않았느냐. 그랬을때 우리는 이런 계기가 올수록 이런 인물을 아껴야겠다 하는것을 우리가 생각안할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시간 됐으니까 이만하죠.
-지금까지 대담에는 전 민의원이였던 이철승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씨였습니다.
(입력일 : 200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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