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20년간 흘러간 역사의 물결 속에 숨겨둔 새 얘기를 다시 찾아보는 정계야화. 오늘도 역시 전 민의원이였던 이철승씨와 신동진 동아 일보 정치부장의 얘기를 들으시겠습니다.
-에 어저께는 해방 후에 학생운동은 역시 좌익이 기선을 제압해가지고 먼저 시작을 했다. 그게 맨 첫번에 나온것이 학생통일 촉진 위원회. 흔히 말하는 학통. 그리고 그다음에 민학연. 소위민주학생연맹. 이렇게 해서 신탁통치 발표되기 조금 전서부터 좌익들이 조직적인 학생운동을 시작 했는데 이에 비해서 우익학생들은 조직화 된 활동을 시작하는게 훨씬 늦어졌다. 이런 얘기를 이제 들은 다음이었는데요 -네 -그럼 그 우익 학생들의 소위 조직화 이 시초를 얘기해 주실까요? -그 시초는 몇번 제가 얘기했지만 그 반탁문제가 처음 보도가 될때에 12월 28일서 30일까지 서울에서 학년이...반탁학년이 조직이 되고 그다음에 전국적 조직을 하기 위해서 1946년 1월 7일인것 같습니다. 그 이듬해 바로 그건 정동 예배당에서 서울대학의 계훈제 군이라던지 산과대학의 지금 최영근 의원이라던지 외무장관으로 있는 지금 이동원군이 지금 연희대학 대표로 나오고 함종민군 -민주당 의원이었던 -네 -송원영군 오홍석군 박갑덕이라고 이제 그 연희대학 대표 또 산과 대학 대표는 김제순군 -아 지금 공화당 의원 -그렇습니다. 그런분들이 전부 모여가지고 반탁전국 학생연만회를 조직했습니다. -아 그러면 그전에 저 위원장으로 처음 그 이의원이 하셨다는게 역시 -네 그때도 계속 제가 위원장 자리를 더 보게 되었습니다. -부위원장은요? -부위원장은 그당시에는 아메... 그 유학생 동맹인가? 거기서 온 그 친구가 맡아 했습니다. -지금 얘기한 여러분들이 이제 그 간부들이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중심으로 되있고...그 다음에 이제 우리가 우익 이 학생운동은 어떻게 전개가 되었느냐? 하는 말씀을 드릴것 같으면 원래 우익에 학생운동이라 하는것은 소위 민족주의 진영에 학생운동이다. 또 좌익의 학생운동이라하면 공산주의 진영이 학생운동이다. 그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민졍주의라 하면 에 좌익에서도 민족주의를 찾을 때도 있고 우익에서도 민족주의 찾고 근데 우익의 학생운동은 언제까지나 그나라의 그 민족적 위기가 올때에 그 민족의 선구요 희망인 학생들이 반드시 앞장서게 두고 또 뒤에서 감시하게 두고 하는 역사적인 고찰을 우리가 더듬어 볼때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다. 애굽에서 학생운동이나 인도에서 학생운동이나 또 중국에서 5.4운동같은 거라던지 또 우리나라에 3.1절 3.1운동이나 광주학생사건이나 이북에서 신의주 학생사건이나 이것이 전부 민족적인 문제를 독립자주 저항운동 내지는 이제 민족의 근대화 운동. 여기에 앞장 서는게 이제 민족진영의 학생운동회기 때문에 공산주의식 불로리타리아 생명을 위해서 계급 투쟁을 해서 어느나라 국경이 없이 한다. 다만 민족주의는 공산주의가 백성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이용을 한다.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래 신탁통치라는 이런 우리 민족이 전무 후무 없이 유사이레 없이 한번 단결해봤던 해가 반탁하던 직후 좌익서도 반탁이다 우익서도 반탁이다 오늘날 그때 한번밖에 없었다느걸 그전에도 한번 말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반탁학년때는 좌익학생도 많이... -초기에... -참여했죠? -참여했다가 초기에 했다가 풍로당에 이북 공산당에 지령에 의해서 기계 돌아가듯이 돌아가기때문에 거기서 이제 민족진영 학생운동이 그 힘을 많이 입었어요. 그냥 내비두면 민족 진영 학생운동이라는게 자연발산적인 산발적인 하나의 그 복지운동, 학생 친목운동 거기에 불과하던것이 이 독립 구국의 위기에 있어서 전국적인 규모로써 조직이 되었다. 그러면 제일 그 어떤 사태가 하나 벌어졌냐 할거 같으면 1월 18일 사건이라는게 대한 민국의 반탁운동과 학생운동의 가장 그 기점으로 우리가 말할 수있는 학생운동입니다. 1월 18일 학생운동이라는건 정동 예배당에서 우리가 반탁학생연맹 주최 총 궐기대회를 하는 반이였는데 그 궐기대회하는 그 모멘트라고 할까 자극을 받동것이 1월 46년...1월 17일인가 15일 박헌영씨가 에 한국은 신탁통치한 뒤에 그 뒤에 소련 연방으로 편입 할수가 있다. 이얘기를 그 뉴욕타임스에서 보도한것이 보도가 다 됬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자극을 다 받아가지고 세상에 이럴수가 있느냐 그래서 우리가 자주 독립을 위해서 36년간 이 고생을 했는데 바로 소련의 그 연방에 든다는건 말이 리니다 해가지고 순수한 학생들이 거기서 궐기한 것이 그것이 계기가 되서 대회를 끝내고 나오면서 인민보가요 그때 참 열렬한 좌익의 참 PR하는 신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네 -또 인민당이 있고 인민위원회 지금 그 민정당 사무실로 됬다고 그럽니다만 그게 전국학년짜립니다. 지금 과거에 -그게 지금 학생들이 습격을 하고 거기서 또 까익 학생들이 추돌이 되서 학병동맹들이 우리 학생들이 대모를 하고는 에 경교장? 죽점장이라도 했습니다. 김구 선생님 앞에 가서 만세불르고 선생님한테 참 우리 결사하자 한사코 반탁을 한다는 보고를 하러 가는 도중에 뒤에서 삼천동에 있던 학병동맹친구들이 습격을 해가지고 거기에 지금 외무부에 있는 함영훈이란 사람이 총을 맞아서 지금 가슴속에 폭탄, 총알이 박혀 있고 에 이광세다 여러사람이 희생을 당한 일이 있어요. -그때 그 정동 예배당 학생대회는 몇명이나 모였... -그때는 한 삼천명가까이 밖에 입추에 여지가 ...그게 중심이 되서 대모운동을 아마 일으킨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학소에 삼천동에 학생동맹이 아니라 유학생동맹이죠? -삼천동에 그 학병동맹입니다. -학병동맹 그 얘기를 요전에 바로 정계야화 시간에 장택상 수도... -예 그분이 첫번 ...일으켰다 하는게 맨날 그얘깁니다. 허허 -그러셨는지 모르겠지만 -예 제가 잘 압니다 그때 그러고 이제 정식 우리가 반탁만 가지고는 안되겄다. 학생운동이 어디 반탁만 하는게 학생운동이냐? 이건 학생 상호간의 친목, 학생상호간의 지휘향상과 그 복지. 그 다음에는 계몽운동 예를 들면 우리가 여름이면 이 동아 일보에 와서도 협조를 많이 받았습니다. 방학때 그전에 그 문화로트운동이라고 그게 문맹 퇴치운동이 든 훈련에 대해서 강사들을 모셔다 놓고 학생들이이 문맹퇴치운동을 그때 시작했고 원한의 38선이라는그 연극을 학생들끼리 해서 ...극을 해가지고 지방 계몽을 나가고 또 동시에 이제 지구 조직을 하고 지방 조직을 한뒤 주로 인제 그 반탁 문제가 중심이 되어서 전국학생연맹이라고 하는 조직으로 반탁 두글자를 띄자 띄는데는 서북 학생연맹과 경성제국대학 그때 서울대학의 동지회가 있어요. -네 -그 채문식 씨라고 지금 민주당에 관계 합니다만 또 이인세씨라고 그 또 박용만씨라고 유학생동맹의 대표 -아 요전 바로 이 전 박용만씨가 정계야화에 나왔었죠. -네 그분과 김호영씨 유학생 동명 그 서북 학생연맹이 또 있습니다. 그분들이 합쳐가지고 전국 학생연맹이란 걸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것은 우익 진영의 학생운동이라는것은 도저히 그 이론적으로 말씀이에요. 혼란...일정한 체계가 서지 못하기 때문에 저번에도 좌익학생은 기계화하고 일원화해서 팜플렛만 보면 공산주의 체계하에서 뭐 ...얘길 하지만 우익진영엔 뭐 이론적 체계가 없으니깐 이얘기는 전부 좌익 학생들이 학생회를 하게 되면 열게 되고 그러고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만 하더라도 우익학생들은 흔히 말하는 테러...뭐 백...사람들이 말하는 그 백색테러만 한거...뭐 별다른 그 고문을 하지 못하고 언제나 그 완력에 의해서 학생들을 좌지우지했다 이런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글쎄요 근데 그런 얘기는 저 적색이다 뭐 백색이다 다들 그런 얘기를 했는데 사실 그 우익 진영에는 이론적으로 체계가 안섰다 그건 사실이고 또 하나 그 우리 학생운동 민족 진영 학생운동은 그 좀더 여유있는 사람들이 협조를 않습니다. 또 여유 있는 사람들의 ...는 뒷방에다 감춰놓고 다방에나 돌아다니게 하지 열렬하게 나오지 않아요. 그럼 어떤 사람들이 학생운동을 했냐 이북에서 넘어온 서북학생들 그사람들이 중심이 되가지고 학생운동에 앞장섰는데, 예를 들면 인촌선생 사모님께서 돈을 걷어가지고 쌀을 걷고 부인회를 통해가지고 서북 학생 원어회를 만들어서 괴동집 뒤에 사무실을 얻어서 서북학생원회를 만든다. 마 이런 일을 하고 또 한가지는 그 민족진영학생 운동에 가장 그 외로운 것이면서도 장점이라고 하는 이유는 군정이 당시에 미국사람이 군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군정하고 정면으로 투쟁해가면서 또 좌익진영의 그 이북의 지령과 소련의 지령과 정면으로 투쟁해가면서 싸울수 있는 자주성. 이론적으로는 체계가 안섰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다원적인 요소라는게 민주주의의 기본이 아니겠느냐 심지어 우리가 그때 말하기를 지금도 그런얘기를 듣습니다만 젊어서 공산주의 이론을 모르고 거기에 도취안된 놈은 좀 싱거운, 모지란 사람이고 늙어서까지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은 좀 그사람은 돌은 사람이다. 그런 얘기가 있었고 지금도 우리가 생각해보면 그당시에 자본주의다 미 제국주의다 뭐 공산주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보면 공산주의나 제국주의나 뭐 자본주의나 공산제국주의나 뭐 다를것이 뭐가 있느냐 그때 누가 감히 소련과 중공이 그 파운다리 국경문제가지고 저렇게 대립을 하고 싸움을 하고 할것을 누가 알았으며 오늘날 공산진영이 자본주의 이상으로 지금 그관의 힘을 가지고 능률을 낼라그러고 자본주의진영도 이제는 말이에요 과거의 자본주의 같은 그 인상 말로 하는 자본주의같은 인상이 아니라 사회주의화 해나가는 그런 문제를 생각할때 오늘 우리가 과거에는 너무 어리석었다. 학생들이? 그런이론이 없었다. 이런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에 알겠습니다. 그 학생운동의 대강 요강은 지금 말씀대로 알겠는데요, 그학생운동시절에 여러가지 사건같은거 이런얘기를 내일 좀 들려주시길 바랍니다. -네
(입력일 : 2008.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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