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20년간 흘러간 역사의 물결속에 숨겨진 새 얘기를 다시 찾아보는 정계야화 오늘도 역시 전 민의원이었던 이철승씨와 신동진 동아일보 정치부장의 얘기를 들으시겠습니다.
-어저께는 해방되던 1945년 12월 27일에 신탁통치 결정이 알려지자 이 의원은 때마침 방학이라 시골로 내려가려고 서울역에까지 나왔다가 다시 되돌아와가지고 반탁을 위한 학생운동 규합이라고 그럴까요? 이런데로 이제 나서기 시작하셨는데... -그게 계기가 됬습니다. -이게 이제 좌우익의 대립 첫 계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에... 학생운동이 우리가 말씀드릴것 같으면 세단계로 나눌수가 있는데 그 한단계는 해방 직후에서 신탁문제가 논의 될때까지 그다음 단계는 반탁이냐 찬탁이냐 하는 문제를 한참 싸우는 단계 그다음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한 뒤에 학생운동 이 세가지로 나눠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해방후 초창기 학생운동을... -네 -그렇죠 -그러니까 그 신탁통치 문제가 나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좌익 우익 학생의 무슨 대립이라던가 이런거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진 않았던거죠? -왜요, 그 전국적인 공개적인 규모에는 없었지만 벌써 좌익에는 하코부동은 학생운동이 있었고 우익에는 산발적인 운동밖에는 없었습니다. -아 그니까 말하자면 좌악에는 뿌리깊은 근거가 있었는데 그 민족진영이라고 그럴까? 우익쪽에서는 별로 이렇다 할 조직이니 이런걸 체 시작도 못했다 이런거죠 -그렇습니다. 저번에 제가 언급한 바도 있습니다만 건준이란게 재빠르게 학생들가지고 치안 유지를 하고 건준에 뒤에는 공산당 조선 공산당이 대비해가지고 전 대중에 파고 들어가있던것만은 우리가 민족진영은 아무 대비가 없었다. -아 건국준비위원회 네. 그러면 그렇게 해서 결국 이제 좌익 학생들이 구체적으로 인제 찬탁으로 나오고 여기에 인제 대항해서 반탁학생들이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거 아니겠어요? -그렇습니다. 그래 제 경우를 통해서 말씀드릴것 같으면 제가 해방 후에 보성전문을 다시 들어가게됐어요. 저번에도 언급한 바가 있는데 인촌 김성수 선생과 또 장덕수 선생, 진성록 선생 이런 소위 민족진영의 선생들이 고려대학교 그 교주들 이런분들이 학생회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래 고려대학에서 교장으로 계시던 김성수 선생께서 내가 학교에 와야겠다 그 이유는 전 보성전문도 졸업맞고 또 고려대학으로 학부를 승격하기때메 다시 공부할 수 있는 순간적 그 교도...교량적 역할을 할수 있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저를 오는게 좋을것 같다. 그래 학교를 가봤더니 -아니 그러면 김성수 교장이 추방 되신게 그러니까 저 해방 직후입니까? -그렇습니다. -몇월달이에요 그게 -그게 해방 후에 신탁통치가 되기 전에 9월서 10월 사이에 김성수 선생이 추방을 학생회에서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럼 사임을 하셨던건가요? -그 사임을 학생들이 추방한다고 사임할수 있었을까요? -글쎄 말이에요. -그러니깐 그걸 볼때 제가 벌써 좌익들은 전국적으로 학원을 대중 공산화하고 적화하는 운동을 선방에 섰다. 그러면 제가 좌익의 학생운동을 좀 줄거리를 개려서 말씀드릴것 같으면 당시에는 학생운동 촉진 위원회란 것이 서울에서 조직이 되서 학통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 그게 그 건준산하인가요? 그러니까? -에 건중에서 인민공화국에서 조선공산당의 행동대로써 학통이란게 생겨가지고... -몇월달 쯤이요? -그게 아마 신탁통치가 생긴 후에까지 그게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요? -그 전에도 학통같은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간판은 안달았겠죠? -네 -근데 그 뒤에 학통이라는것이 정식으로 신탁통치가 생길 전후에서 신탁통치가 생겼어요. 그래서 그 초대 위원장이 김연생이라고 하는 친구인데 그 사람은 반탁문제가 생길때 반탁학생운동회 부위원장으로 있고 제가 위원장으로 되있었어요. -어느학교 -그 사람이 보성전문을 다녔습니다. 그 사람도 -네 -좌익계통의 두목이고 저는 우익에...민족진영이라고 할 수있는데 그래서 그사람이 같이 일하다가 1월 3일날 반탁운동하던 사람이 별안간 공산당에 지령에 의해서 찬탁으로 돌아가기때문에 그 학생이 학통회 위원장이 되고 부위원장에는 에 지금도 모 국회의원 오상직씨라고 -공화당의원말이죠? -네 그 분이 거기 있었습니다. -오상직의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학통이라는게 저 풀네임이 어떻게 됩니까? -학생 통일 촉성위원회라 -네 이렇게 되있고 그래 그 학통위원장 부위원장이 6.25사변 전후로 해서 저행했어요 전부가. 그리고 그 학통이 해산을 하고 얼마 가지를 못하고 민주학생연맹이라고 그것은 조선공산당이 남노당으로 개칭을 하고 남노당에 산하 단체로써 민주항쟁이라는 조직에서 그네들은 전국적으로 대중운동을 하고 남한을 적화 할라고 하는 작전에 최 행동대로써 예를 들면 독서회를 만든다 혹은 학원에 침투한다, 지역별로 조직을 한다, 학교별로 조직을 한다. 그래 그것이 나가가지고는 심지어 국대한 반대라는 것이 한참 유명한것이 터졌습니다. -국대한 반대라는건 아시는 바와 같이 서울경성지국대학 중심 혹은 일본정독시대에 관립학교 전문학교를 이것이 미 군정에 명령으로 인해서 서울대학으로 종합대학을 만들라고 하는것을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그 운동반대하는 그 사람들이 내세운 이름이라는것은 이 관료하에 배격이다. 학원의 자유에 배격이다. 또 미 제국주의에 침투를 배격한다. 그래 반대를 하기 시작하지 않겠어요? -그때 제가 중학생이였는데요 -아 그러셨습니까?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만 상급학교 학생들이 국대한 반대를 위해서 뭐 대모를 하니깐 나와라 해서 뭐 책가방끼고 나가있고..그때 주동이 역시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그 독서회 이것은 이제 좌익들이 비밀히 클래스에서 이제 몇명이 정해분자라고 일컫는 학생들을 뽑아가지고 조직하고 -네 -이 사람들이 중심이 되고 했던게 그게 아마 그 시초였던 거겠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그걸 했다면 그게 학생운동의 떳떳함이 아니겠습니까? 근데 이것은 반탁으로 돌리는것과 마찬가지로 상부지령에 의해서 혹은 또 학청이나 민주학령의 간부들이라는건 거의 표면적인 로보트 역할하고 그 이면에 있어서는 공산당에서 파견한 사람이 키 멤버가 되가지고 이것을 조종을 할수 있는 그런 단계에 있어서 심지어는 국대한 반대가 어디까지 뻗어나왔냐면 밥달라 쌀달라 전부 벽보를 붙혀가지고 그분들이 전개해서 전국적으로 퍼져 근 5,6개월을 맹휴를 일으키고 전국전 소전이 났습니다. 이것이 연장되가지고 대구 10월폭동 11월 폭동까지 이어져 이렇게 나온 일이 있습니다. -네 그때만 하더라도 이제 공산당계통의 그 지령이 아주 속속들이 밑에까지 이렇게 죽 계통적으로 내려올때죠?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번 전행했던 오상적씨라던지 또 그 몇몇 공산당에서 일하던 사람들보고 한번 만나 얘기를 했어요. 도대체 그당시에는 느그는 참 조직적이고 선전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그 참 ...말이요 레코드를 틀어논것과 같이 얘기도 잘하니 맹휴만 한다 하더라도 느그 한 50명이면 민족진영은 한 500명을 갖다놔도 대할 도리가 없다. 그때에 느그는 일사불란 하게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이걸 물어봤드니 오상적군이나 이런분들도 말하기는 그건 학생운동에 표면이 나선 사람들은 로보트고 공산당도 상친부에서는 이게 대립이 심하지만 말단은 하라는대로 하는것에 불과한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당시 좌익의 운동이 가장 의심스럽게 생각하는것은 아 그 해방이 됐으면 민족진영의 성생이나 좌익진영의 성생이나 단결해서 조국건설을 위해서 이바지 하려고 담격에...단결할라고 하지않고 전부 인촌선생같은 우리 노골적인 얘기로 이나라 근대화와 민족운동의 중심이라고 할수있는 김성수 선생까지도 그 교주를 추방할정도 하고 국대한 반대를 해가지고 ...하고 이 혼란상태를 일으키는 운동까지 학생들이 하는것을 우리가 알수가 없다. 그래서 공산주의 학생운동이 조금 지장을 가져온 중요한 이유는 반탁운동하다가 그것이 별안간 찬탁으로 돌아가는것 또 그것이 자주성을 잃어가지고 마치 그 위의 지령대로 움직이는 그런거 그다음에는 그 파괴적으로 폭력적인 행동에서 남로당의 앞잡이로 일을하는 그점에 대해서 좌익운동이 학생운동의 퍽 지장을 가져오고 그대신 이제 우익진영의 학생운동에 있어서는 또 다원적이라 아신바와 같이 임시정부 요인계통도 있고 김성수 선생 한민당 계통도 있고 미 군정도 있고 좌우 합작하는 김식박사도 있고 이승만 박사도 있고 그 대가리가 많기때문에 어떻게 지령을 받는진 모르나 오로지 민족진영학생운동은 에 민족 자주, 근대화를 위해서 움직이는게 우리가 민족진영학생운동에 그 조금 성공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서 결론은 그 한가지 더 말씀드릴것은 박극제 선생같은 분은 내가 회장때 존경하고 사회주의를 거부할때에 배웠던 선생입니다. -아 고대 교수요? -네 그렇습니다. -그분이 찬탁문제가 나오니까 학교..상에서 한 서너시간 그분이 이북에 가기전에 비장한 결심을 했던 모양이에요. 저를 붙들고 "우리나라는 어쩔수없이 신탁통치를 받아야할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인 만큼 우리가 여기서 신탁통치를 받아서 민주주의 과정을 올리기 위해서는 이 자본주의 제국주의가 없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기 때문에 나는 어쨋든간에 우리가 자주 독립을하는 그 신탁통치를 반대해야지, 어떻게 해서 소련을 조국같이 생각을 하는 그런 기계적으로 찬탁을 할수가 있습니까? 이 문제를 가지고 사제지간에 눈물로써 참 얘기하다가 그분이 결국은 6.25사변 전에 이북으로 월북해서 김일성대학 교수하다가 그런 뜻도 이루지못하고 거기서 공산당 내부에서 숙청당한걸 우리가 듣고 눈물 흘린일이 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어쨌든 그 좌익 학생들에 비해서 우익들의 학생은 조직화라든가 학생운동이나 하는게 훨씬 늦어졌다 그얘기 -네 그렇습니다. -그 우익들 학생 얘기를 내일 좀 들려주십쇼. -예.
(입력일 : 2008.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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