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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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이철승 편 - 제4회 학병과 일본의 ’고이소’총독
이철승 편
제4회 학병과 일본의 ’고이소’총독
1965.04.06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 오늘은 그 70번째 시간 학병과 고이소 일본 총독에 대한 얘기를 전 민의원이었던 이철승 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 씨와의 대담으로 들으시겠습니다.

- 어젯밤에는 대개 그 고려대학에 계셨을 때 그 일제 말기 학생들 동향에 대해서 얘길 들었는데요. 어땠습니까 그 학병 이 의원 자신은 학병에 나가셨던 건가요?

- 글쎄요. 뭐 강제로 끌려 갔었죠.

- 그때 그 경황을 좀 들려주실까요?

- 그 아시는바와 같이 학병에 갈때 그 시대적 배경은 신 형도 아시는바와 같이 1943년 그땝니다.

- 네.

- 그때는 벌써 이태리가 무조건 항복을 하고 또 카일로 선언이 나와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때 였습니다.

- 그런거 학교 학생들도 알고 있었댔나요?

- 전혀 모르고.

- 전혀 모르죠?

- 그 당시에는 저번에 말씀한 바와 같이 몇 몇 사회지도자나 도 몇 몇 교수들을 통해서 암시적으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아침 저녁 강의시간 끝나면 그런거 알아들으러 다니는 학생이 한둘 어느 반이든지 있습니다.

- 네. 그때는 어떤 분들이 대개.

- 그 당시 신 형도 아시는바와 같이 여훈영 씨가 한참 그런 방면에 알려져있고 우리가 존경하던 송진우 선생 또 인촌 김성수 선생 또 학교에 있어서는 박흥채 씨다 안호상 씨다.

- 어저께 얘기했던.

- 네. 그런분들 사회 지도자 혹은 교육자로서 그런 분들이 거의 학생들을 뒤에서 암암리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그런 세력이었습니다.

- 네. 그 여훈영 씨 라든가 송진우 선생 같은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 학생들하고 접촉을 하셨댔어요?

- 그 예를들면 학병 거부운동이 나옵니다.

- 네.

- 우리가 그 동안에 지원병이라든지 혹은 공출제도라든지 이런거에 있어서는 별로 큰 저항이 없었습니다만은 학병문제가 탁 나오니까 학생 뿐만아니라 민족 지도자들 전 민족이 큰 쇼크를 받았습니다.

- 그랬지요.

- 그것은 신 형도 아시는바와 같이 그 우리의 일본 사람들이 그 전세가 불리하니까 인적 자원을 최대 동원하는 방법 하나 그 다음에는 이 심장부 민족 운동의 심장부를 말살해버리자는 그런 것으로 하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이다 그러니 우리 학생들은 왜 우리가 그놈들 앞잡이로 가서 개죽음을 해야 할 것이냐 그 이유는 뭐냐. 이 문제 때문에 우리 선배들 찾아가고 하루는 제가 인촌 선생 댁을 개송을 찾아 갔습니다. 가서 인촌 선생께 이 학병제도가 실시 되었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습니까. 인촌 선생은 직접 그때에 보성전문 교장으로 있었어요.

- 네.

- 노골적 얘기는 못하고 암시로 송진우 선생 얘기를 해요.

- 네.

- 그리고 나는 널 부형한테 공부 가르치기로 해서 널 데려온거지 널 보고 죽으로 가는데 가라마라 할 자격은 없다 그리고 피해 버렸어요.

- 네.

- 그 내 송진우 선생 찾아 갔어요. 또 마침 제 삼촌이 제연 국회의원 하시던 석자 주자 그 어른이 주로 그 사회주의 운동하는 분이나 또 민족주의 운동하는 분을 통해가지고 인제 저희들 지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학병은 이건 반드시 거부 운동을 시켜야 겠다 해서 그때사 음성적인 학생운동이 조직화 하기 시작 했습니다.

- 조직이 있어서야 됐습니까

- 네.

- 어떤 방향으로.

- 예를들면 그때 그 서울대학 지금 서울대학 입니다. 그때 경성제대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이혁기라고 하는 친구가 나오고 또 명륜전문이라고 있습니다. 지금의 성균관 대학.

- 네.

- 또 고상, 법전 이런 학교들이 전부 모여가지고 조직 했습니다.

- 네.

- 각 대표들이. 근데 학병을 거부운동을 하자. 이왕에 끌려가서 죽는거나 거부운동 해서 죽는거나 이차제의 삼일정신을 받드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냐. 방법은 3·1운동 때 동경 유학생들이 먼저 그 독립선언을 해가지고 선배들 한테 마찬가지 방법으로써 이번 동기방안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전국적으로 저항운동을 하고 반대운동을 하자.

- 네.

- 이래서 우리가 나누어서 사회의 선배들을 찾아가기로 해서 여훈영 씨도 적극 학병을 거부해라. 송진우 선생도 적극 거부해라. 그런 그 자신을 가지고 거부운동을 했었어요.

- 네.

- 그랬더니 한쪽은 신 형 아시는바와 같이 학병을 권유운동 하는것이 대대적으로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 그렇지요. 그때 그 누구...

- 지금 뭐 국민 총리 몇명 경방당이다 한상영이다. 대당면 들었던 뭐 박중금이다.

- 네.

- 이런 사람들 친일파들 윤치호 씨다. 총동원 해가지고 심지어 문인인 최남선 시나 이광수 씨 까지도 학병 권유운동으로 일본에 보내고 그래서 또 신문 그러니까 학병 권유운동은 강제적 방법으로 하고 한편은 또 마취적 방법으로 했습니다. 강제적 방법은 부모를 잡아 넣고 처자를 잡아 넣고 강요 하는거 또 마취적 방법은 요새 선심정치 한다는 식으로 말이에요. 술도 먹이고 그냥 돈도 주고 별 특혜를 다 주고 특권을 다 줘가지고 마취를 시켜가지고 그 불감증을 일으켜가지고 학병운동을 지원하게 그런 운동이 벌어졌으나 초기에는 이것이 얼마 성적을 내지 못했어요.

- 네. 저 직접 이 의원 한테 어떠한 공작이라도 왔댔어요?

- 아 우리집에 찾아다니구요. 우리 삼촌을 잡을라고 그랬지만 나는 삼촌이 서울에 있기 때문에 난 그 집에 숨어 있어도 난 걸리지 않았습니다.

- 네. 그러면 그러한 때 직접 당하신.

- 네. 하루는 우리가 조직을 해서 겨울방학까지 끌고 나갈라고 그랬더니 그 타이밍을 잘못 잡았어요. 좀 일찍이 노골화 했으면 할건데 그래서 우리가 미안한데 한 학생 마침 지금 그 당시 혜화전문 입니다. 동국대학.

- 네.

- 그 대표가 없어서 그 대표를 하나 넣기로 했더니 그 대표가 어떻게 가가지고 자기 삼촌한테 자랑스러워서 얘기한 모양이에요.

- 아.

- 우리가 학병 거부운동을 이렇게 하고 있다.

- 음.

- 그래서 그 대표가 하루는 오더니 우리 삼촌되는 사람이 문 씨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우리를 만나 보자고 한다. 고이소가 신분을 완전히 보장 할테니 한번 만나자고 한다.

- 아 고이소 총독 말이지요?

- 네.

- 그 당시 고이소는 이 학병이 성적을 올리느냐 못 하느냐에 자기 정치 생명을 ..있는 때였습니다.

- 네.

- 그래서 우리는 이거 큰일 났구나. 조직에 폭로가 되었구나. 거기서 해체하자.

- 네.

- 이런 사람과 그러면 한번 만나가지고 단판을 지어 대책을 세우자. 이런 그 두 세력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문 씨라는 사람이 그 미스코시라고 하는데 지금 동아백화점 인가요?

- 그렇지요.

- 거기에서 점심을 하더군요. 그래서 고이소가 당신네들 만나서 충분히 얘길 듣고싶어 하니 거기 가서 얘기하면 되지 않느냐.

- 아.

- 이런 그 얘기를 듣고 우린 결론으로는 고이소를 만나기로 해서 효자동 종점에 오후 4시 그때 11월 말쯤 될겁니다. 그때까지 학병이 3분의 1도 지원이 안됐는데 피알은 뭐 거의 다 지원되는 것 같이 피알한 땝니다.

- 네. 그러니까 총독 관저 지금 청와대 거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 그렇습니다. 그 당시 일본 놈 때에 제가 청와대 지금 총독 관저에 간다는건 참 어마어마 했을 땝니다.

- 어땠습니까, 그때에.

- 지금 제 기억을 더듬으면 들어가면 바른쪽 편에 그 리셉션 하는 큰 홀이 있지 않습니까?

- 지금도 있지요.

- 네. 거기에 인제 비서 하나만 두고.

- 음.

- 거기서 혼자 남아 군복을 입고 이가 빠졌는지 호랑이 같이 생겼습니다. 호랑이 상 입디다 고이소가.

- 네.

- 그래서 거기에서 우리 주창은 왜 우리가 죽으러 가야 할거냐. 왜 더군다나 공부하는 사람만 쓸어 갈거냐. 그래서 그 당시 하나는 맡았습니다 담당을. 상과대학 다니는 사람 징코상 너는 동척이 우리나라 식민지로써 농촌을 오늘날 영세화 해가지고 착취한거 거기에 대해서 데이타를 가지고 공격을 해라. 또 한 사람은 너는 그 상급학교 입학 하는데 서울대학이다 관립학교다 입학 하는데 뭐 100대 1이나 50대 1이니까 그 뭐 못가는 얘기 어떤 사람은 뭐 일본 외경이 우리 참 우리를 못살게 탄압하는 이야기 이런걸 전부 파트를 나눠가지고 항의를 했습니다.

- 상당히 용감 했군요. 그 총독 앞에서 학생들이.

- 그 뭐 그때는 우리는 48인 역할을 해가지고 우리가 먼저 ..을 두면 겨울방학에 우리 학생들이 삐라를 가지고 시골에 가서 이걸 돌려놓으면 선배들이 여훈영 씨나 송진우 씨는 그 다음에 나오기로 순서가 이렇게 됐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 탁 놓고 들어간거지요.

- 네. 그래 총독이 뭐라 그래요.

- 총독 얘기는 먼저 당신네들 얘기부터 해라 이거야. 우리 첫번에는 아주 거기서 독립선언이라도 하고 잡혀가기를 바라고 갔는데 이 놈이 능란한 구렁이 같은 놈이라 먼저 1대 1로 답변하지 않고 당신네들이 먼저 얘기하고 싶은걸 먼저 얘기해라.

- 전부 하라?

- 어. 그러면 내가 종합적으로 얘기해주마.

- 네.

- 그러더니 우리 얘기를 듣고 나더니 껄껄 웃으면서 자기가 60평생 이런 말 듣기는 처음이고 이런 반가운 기회가 없었다. 그러면서 요지는 우리가 맨날 듣던 얘기 내선 일체다. 근데 일본 사람들이 너무나 한국을 차별 하는걸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난 총독으로 나온거다. 그러니 이 앞으로는 민의원 선거 까지도 소위 중의원 선거

- 그렇지.

- 한국 사람이 나오게 되고 완전히 한국민의 조선민족을 어떻게 처우를 개선하느냐 하는 문제를 고려하기 때문에 1층에서 3층 갈려면 뛰어 갈 순 없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합디다.

- 네. 학병을 나가야 똑같은 대학생일 수 있다.

- 그러니까 너가 그런 증거를 보이고 한 피를 흘려야지 일본 사람 가면 되냐.

- 네.

- 그래서 인제 끝나고 저녁을 먹자고 대접을 하더군요.

- 아. 일본요리 였어요?

- 일본요리를 내놓고 저쪽방에 아주 잘 차렸습디다. 그래 우리는 먹지 말고 나가자.

- 네.

- 하다가 여기까지 나온 김에 다 끝내고 나가서 대책을 세우자. 근데 마침 제가 인제 좀 그때 과격한 얘기 나누는데 송진우 씨가 뒤에서 직접 지휘를 하고 있으리만큼 했더니 너는 어느 학교 학생이냐 나보고 물어요.

- 네.

- 나 보성전문학교 학생이다 그랬더니 음 그래? 아 김성수 군은 참 물 샐 틈 없는 사람이야. 일본말로.

- 네.

- 그렇게 얘기를 합디다. 그래서 그때 얘기는 학교를 다 줄인다고들 그래요.

- 네.

- 그 뭐 그때 얘기에 세브란스도 없어지고 무슨 상과대학도 고상도 없어지고 또 법전도 없어질 때 그래 제 육감은 아직까지는 얘들이 보성전문 민족의 힘으로 만든 학교는 없앨 수가 없지 않겠느냐 이런 육감을 느꼈습니다.

- 네. 그리고 나서 어떻게 해서 학병에 결국 나가시게 됐죠?

- 그래 내가 나와가지고 이사람이 신분보장을 완전히 한다고 그랬거든. 그래 경무대 앞에 나와가지고 해체 선언 했어요.

- 네.

- 그래놓고 여긴 인제 폭로가 됐으니 이 다음에 제기 운동을 하자 해서 비밀리에 만나기로 했어요. 그랬더니 마침 성대 대표 이석기 씨는 서대문 형무소에 잡혀가고.

- 아 저 요전 민의원 이석기 씨.

- 아니요. 그 이석기 아니에요. 지금 국군 준비대 총사령관 해가지고 해방 후에 이북으로 간 사람입니다. 성대 대표 입니다.

- 네.

- 나는 20일날이 마감인데 내용적으로 닷새를 연기했던 모양이에요.

- 네.

- 12월 20일이.

- 네.

- 안심하고 학교를 나가 봤더니 헌병이 딱 지켜서서 그 지원해야 한다. 그래서 25일날 마감에 연기된 날 할수밖에 끌려서 학병 갔습니다.

- 어디로 갔어요?

- 일본 오사카라는데를 가서 하마터면 죽을뻔 알았습니다.

- 그러면 학병간 후의 얘기는 또 내일 또 듣기로 하겠습니다.

- 네.

(입력일 : 200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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