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그 69번째 시간, 일제 말기의 항일학생운동에 대해서 전 민의원이었던 이철승 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 씨 와의 대담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 이 의원 하면 학생운동으로 생각 안했었습니다. 네. 우리나라에서 학생 운동은 멀리 3·1운동때 라던가 또는 4·19때 라던가 할것 없이 그 우리나라에서 학생과 그 정치와는 일종의 불가분의 관계라면 불가분의 관계 같이 되있는데요.
- 그렇습니다.
- 그 이 의원의 학생 운동이라고 그럴까 이런걸 좀 앞으로 얼마동안 좀 계속해서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 네.
- 근데 그 저 이 의원이 학생시절 그러니까 일제시대하고 해방 후에 걸쳤겠지요?
- 그렇습니다.
- 일제시대 때에는 어땠댔습니까.
- 그 저는 일제의 말기에 대학 전문학교를 다녔고 또 중엽에 일제 말기에 중학을 마치고.
- 어디 다녔죠?
- 저희 중학은 전주 고등학교 입니다, 지금. 그 전에는 북중학교 라고 그랬습니다.
- 네.
- 그래서 일제 말엽의 학생운동은 하나의 그 공개적인 민족운동이 아니라 레지스턴스 저항운동 이라고 할까 하나의 민족운동이라고 할까 그런 형식으로 삼발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제 경우를 통해서 잠깐 그때의 그 배경을 한번 살펴보기로 할것 같으면은 이렇습니다. 저는 전주 고등학교 북중학교를 다녔는데 5학년에 하마터면 퇴학을 맞을 뻔 했어요.
- 어째서요?
- 마침 그 우리학교에 그 지리역사 선생이 그 노다 라고 하는 선생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상의군인데 상의군이 일본 상의군이에요.
- 아, 일본 사람 이었군요.
- 네. 그 뺏지를 달고 어떻게 무모한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심지어는 한국 사람들이 쓰는 국문은 야만인이 쓰는 부호에 불과하다 그 저가 만주벌판 다닐 때에 중국 사람들을 몇 십명을 죽이고 한국 부락을 습격해서 여러 사람들을 희생 시켰다 이런 소리를 시간마다 이 놈이 자랑으로 얘길 하니 철 없는 중학교 학생들도 사무쳤단 말씀이에요. 전교가 우리가 모여서 한번 이거 한번 혼을 내 주자. 그때 저항운동이 그런데 나타나는거지요. 전교 학생이 운동장에 모였을 때 그 노다 선생이 강연을 할 때 입을 딱 오므리고 음 소리를 냈습니다. 전원이 음을 하니까 입을 오므리니까 어느 놈이 한 줄을 알수가 없단 말이에요.
- 그렇지요.
- 그러니까 정신을 이 사람이 못 차렸어요.
- 네.
- 그러다가 5학년 반 우리가 상급학교 가느라고 시험 준비를 하는 반인데.
- 아, 졸업반 이었군요.
- 네.
- 우리반에 와서 또 오길래 우리들잉 또 음 소리를 또 냈지요.
- 네.
- 그랬더니 이 사람이 아주 신경이 돌다시피 해가지고 거기에 있는 목검을 가지고 내 옆에 있는 학생을 때린단 말이에요.
- 네.
- 때리는걸 내 잡아서 그 사람이 한지 당신이 어떻게 알고 이 학생을 때리느냐 그래서 그냥 내꼰져버렸단 말씀이에요, 당장에. 선생이 떨어져버려노니 그때 저는 창시도 안했지요 또 우리나라 말도 못 쓰게 하는 판이지요 고등계 형사들이 전부 따라 다니지요 5학년 반에 더군다나 공립학교 거기에서 그런 꼴을 당했으니 꼭 퇴학 맞았지 별 수 있겠습니까.
- 그때나 지금이나 완력은 좀 자신이 있었단 얘기네요.
- 아니요. 천만에 말씀이에요. 그때의 정신이 근데 내가 퇴학을 맞았으면 보성전문이나 고려대학을 갈 도리가 없었을건데 기적이 하나 생겼습니다. 신 부장 그 기적을 맞출 수 있습니까?
- 글쎄요.
- 그 그때 관립학교에서 그런 사태에서 퇴학을 안 맞았다는 이유는 우리반이 그 50명이 상급학교 시험 보느라고 뭉쳐있는 반 입니다.
- 음.
- 또 50명은 취직하는 반이고.
- 네.
- 그 50명이 전원이 퇴학을 하기로 결의를 했어요. 이철승이를 퇴학하면.
- 네.
- 우리 대표로 싸운거지 이철승이 혼자 책임이 아니니까 우리 전체를 퇴학 해야겠다.
- 네.
- 그러니 학교를 문을 닫게 되었어요. 그러니 졸업이 몇 달 안남았으니 이 놈 밀어내면 되지 않느냐 그래서 품행 병으로 그 졸업을 맞으니 어디 학교 시험 볼 데가 없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보성전문을 일본 말로 후세이.
- 네. 부정있는...
- 학교라. 그래가지고 거기 소견표를 써주더군요.
- 네.
- 그래 보성전문 시험을 보니까 거기 선생들이 구두 시험에 빙긋이 웃으면서 품행 병 같은건 생각도 안해요.
- 네.
- 그래 보성전문을 붙은겁니다. 그것도 한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 고려대학이요.
- 네.
- 고려대학 그러니까 보성전문에 계셨댔을 땐 어땠어요.
- 그렇습니다. 그때의 제 담당이 안우상 선생이 제 그 담임 선생님이셨습니다.
- 아, 초대 문교 장관이었던.
- 네. 그렇습니다. 그 당시 우리 반에도 없지않아 그 이상스러운 학생이 한 둘 끼어 있었어요.
- 그때만 하더라도 그 보성전문이 또 우리나라 그 독립 그 그 방향에 종사 하시던 분이 많이 계셨댔지요.
- 그렇습니다. 민족주의 하고 소위 그 사회주의 하고 다 강력한 선생들과 세력들이 보성전문에 집중하다고도 과언이 아닌데 그때도 끈나풀이라고도 하고 스파이라고도 그랬는데 학생들이 등록금 좀 받고 혹은 용돈 얻어서 동대문 경찰서에 고등계에 연락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금 말하면 뭐 내가 생각하면 요새 하도 유행되는 YTP의 한 고조 할아버지 쯤 될라나 모르겠습니다만은.
- 에.
- 그리고 배속장교도 있어서 ROTC 내에 그런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안우상 선생이 가르칠때에 말씀이에요.
- 그때도 역시 철학 담당이었나요?
- 네. 철학과 윤리를 가르쳤는데.
- 네.
- 그 양반이 일본 말을 잘 못해요. - 아.
- 그래서 모인숙 선생이 그 부인이셨습니다.
- 그렇지요.
- 그 분이 전부 그 강의안을 일본 말로 번역해 주면 가져와서 더듬더듬 그 놈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아 이거 선생님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합시다.
- 네.
- 그랬더니 안우상 씨가 그 말 나오기를 바랬다고.
- 네.
- 너희들 문 닫아라. 그래서 창문을 다 닫고 그땐 뒤에 뭐 고등계 애들이 다 으레히 주저원들이 있었으니까 운동장에.
- 네.
- 말하기를 제 일생 영원히 잊지 못할 얘기를 쇼크를 받았어요.
- 아.
- 그 얘기는 약소민족은 노트가 없는거다. 우리가 인제 배낄라고 선생님 강의를 배낄라고 초년병들이니까 그랬더니 노트가 없는 것이다. 입으로 입으로 후손들 한테 전달 하는거다. 그러면서 요지가 내 지금도 그 구절을 외우는데 우리나라의 한국의 조선의 문화는 가장 천대 받는 기생 또 천대 받았던 그 중들 그 사람들이 고유한 문화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 관립학교나 일본 공립학교 총독부 학교 다니던 놈이 그 얘기를 들을 때 이건 뭐 딴 세상에 온 것 같습디다.
- 그랬겠지요.
- 그래서 그 당시에 한번 선생 집을 찾아 가느라고 안암동에 계시는 안우상 선생 댁을 갔었어요.
- 네.
- 그랬더니 일제 말기라 불을 촛불을 켜 놓고 등화간재..도 되고 그럴텐데 밖에 누가 날 건드려요. 보니까 동대문 그 경찰서의 형사 아니에요?
- 아 지키고 있던...
- 네. 너 뭣하러 갔다 왔냐.
- 아.
- 나 우리 담임 선생님이니까 인사하러 갔다 왔다. 저 안방에서 촛불에서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그래 우리 그 안우상 선생 하고 모시고 또 우리가 그 얘기한 얘기를 몇 개 말씀을 드리면은 그 사립학교 학생들 사립학교를 다니고 올라 온 학생들과 또 공립학교를 졸업 맞고 또 올라 온 학생들과 그 학생들간에 토론이 벌어졌어요. 사립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우리는 사립학교 다녔으니까 오히려 민족의식이 강하고 오히려 좋다 이런 소리를 당당하게 하고 또 공립학교 다녔던 학생들은 공립학교에서 규칙생활도 하고 또 일본 선생들한테 탄압도 받아봐야 뼈저리게 알지 너 그 뭐 중앙고보다 배재중학이다 너 다녀봐야 너 그 뭐 그런 뼈저리게 느끼지 못하지 않느냐. 그래 이제 싸움이 토론이 붙었어요. 안우상 씨가 앉혀놓고 판정을 하는데 말하기를 그 당시 이렇게 말합디다. 군사부일체란 말이 있지 않느냐. 군은 나라에 충성 하는거고 사는 스승에 대해서 존경 하는거고 또 부는 아버지에게 효도 하는 것 아니냐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나라가 없다. 군사부일체가 되지 않아. 나라가 없으니 사립학교 다닌 학생들은 선생을 존경하고 스승을 모시는 그 기회가 많이 있었고 관립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공립학교 총독부학교 다니던 학생들은 선생한테 일본 선생한테 눌리니까 형 적으로 동지간의 친구간의 단결력 우애 이거 굉장하지 않느냐 그러니 이 민족과 이 친구는 인생의 꽃이니 그 결속과 동시에 스승을 모시는 것과 또 아버님 한테 효도 하는것 군사부일체는 이런 방향으로 해야 한다. 이런 말씀을 하셔서 제가 지금 학생운동이라는건 그 당시의 그 이율곡 선생 또 안도산 선생 이런 분들을 우리가 생각 안할 수 없습니다. 안도상 선생만 하더라도 그 민족운동을 곧 잘 하시면서도 그게 민족운동이 막연한 것이 아니라 소위 근대화 하는 민족운동 문화를 더 발전시켜 보자 하는 그 민족운동과 또 항일운동 하는 민족운동과 또 한가지는 우리 민족끼리 생산적인 것 건설적인 것을 보호하자는 민족운동 이럴 때 우리는 그 당시 안우상 씨나 이런 분들 그런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일단 유사시에 학생들이 그 어느 지도자나 선생들 한테 그 교훈을 받을 때에 뭔 일이 있어도 저항력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가 가장 안심할 때는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전개 될 때에 나라가 안심이 되지 가령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신 부장 그 영국에 그 런던탑에 불이 켜졌을 때 영국 국회가 활발하게 움직일 때 런던의 시민들은 발을 뻗고 잘 수 있다. 이런 말이 있는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일제 말기의 학생운동은 대단히 삼발적이고 미미 했습니다만은 이런 합방 전 학생운동도 거의 없었다고 그럽니다.
- 네.
- 그런데 율곡 선생이 지도 할 때 임진왜란 때는 그 유생들이 총궐기 가지고 싸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학생운동이 얼만큼 민족운동의 핵심이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 그때 그 저 고려대학에 계시던 그 민족적 지도자 되실만한 분들이 여러분 계셨댔잖았어요?
- 그렇습니다.
- 그 당시 저 장덕수 선생의 그 참 학생에 대한 훈도 라는건 참 심각했고.
- 장 선생이 그때 뭘로 계셨었나요.
- 학생감으로 계셨습니다.
- 아 네.
- 또 사회주의 경향이 있던 윤행준 씨, 박학재 선생.
- 그 분들은 다.
- 그 분들은 6·25 후에 이북으로 가가지고 거기서 또 숙청 당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네. 그 분들의 그 영향력은 어땠드랬습니까.
- 그 분들도 강의 할 시간은 1초의 여지가 없습니다. 굉장했습니다.
- 그때 뭐 그러니까 결국 강의시간 과외 활동 이런게 결국 직접적인 그 일종의 민족 집결체의 그 하나의 센타마냥 됐겠지요.
- 그렇기도 했습니다.
- 네. 그때 그 고려대학 하면 뭐 학생운동으로 참 아주 원점이 되다시피 했는데 그때 그 곧.
- 저희들 들어가기 전에는 학생운동이 활발 했어요. 그때는 일제 말기가 아닙니다.
- 네.
- 그때는 김성곤 씨 라던지 그 분은 또 인제 다른 파에 있고 호걸파가 유승종 씨, 저는 호걸파 대장이고 그래가지고 학생회가 아주 자발적으로 자치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 곧 그 종전이 돼가지고 학병 인가가 나오고 그럴때는 어떻게.
- 그 영향을 받아서 인제 학병제도가 실시돼서 학병거부운동이 생겼습니다.
- 네. 그 학병에 관한 얘기는 그럼 내일 계속해서 듣기로 하지요.
(입력일 : 200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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