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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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이철승 편 - 제2회 망명의 미국행
이철승 편
제2회 망명의 미국행
1965.04.03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 오늘은 그 68번째 시간 망명의 미국행 얘기에 대해서 전 민의원이었던 이철승 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 씨 와의 대담으로 들으시겠습니다.

- 어제는 이 의원이 그 난민여권을 갖고 미국으로 떠나신 얘기까지 들었는데요. 그때 그 크리스 마스날 떠났다 그러셨죠.

- 그랬습니다.

- 네. 그 맨 첫번에 어디로 들르셨어요.

- 하와이를 갔었지요. 거기서 좀 앞으로에 대한 정처없는 구름같이 뜨니까 거기에 대한 마음을 좀 가다듬기 위해서 며칠 좀 쉬었습니다.

- 네.

- 거기서 또 역시 크리스 마스를 맞이 했습니다.

- 아.

- 그건 아시는 바와 같이 하루를 미국에 가면 더 이익을 보게 되는 그런 경우기 때문에.

- 그렇지요. 날짜가 바뀌니까.

- 네.

- 그 하와이에서 크리스 마스를 맞으신 감상이 어땠어요.

- 일본도 보고 미국사람도 봤지만 남의 나라는 저렇게 엔조이를 하는데 나야 뭐 화석이 되다시피 되있는데 뭐 참 서글프기 짝이 없었어요.

- 크리스 마스 여부 없겠지요.

- 네. 그렇습니다.

- 국적 없는 난민으로서.

- 네.

- 하와이에서 어디로 떠나셨어요?

- 그 바로 그 캐네디 에어포트에 도착 됐습니다. 아침에 거기도 여기 과거에 제 친구들도 있고 또 임창령 대서 하던분 정규용 씨 여러분 있지만은 엊그저께 유엔 대사로 대표로 갔던 사람이 180도 돌아서 이 유랑아닌 유랑민으로 떠나게 되니 무슨 정황으로 연락을 하겠습니까. 일체 연락을 않고 뉴 캐네디 에어포트에 내렸더니 땅땅 얼어붙은 공항 입니다. 저절로 이가 뽀득 갈리더군요.

- 하하하. 그야말로 추운 날씨에 참 따분하셨겠군.

- 그렇습니다.

- 거기서 그래도 누군가 친지도 전혀 없었댔어요?

- 네. 제가 그 내 동서가 없었더라면 당분간 어디 의지할 길이 없었지요. 뉴헤븐 캐네디 카트라고 예일대학 있는데 한 3,4,5개월 거기 있었습니다.

- 뭐 물론 그 동서 분이 원조를 하셨겠지만.

- 네.

- 어떠세요. 그때 뭐 낭중에 수중에 여유 같은건 전혀.

- 뭐 아시는 바와 같이 동서 아니었더라면 큰일날뻔 알았구요.

- 네.

- 또 우연하게도 참 농부가 되기 위해서 인터뷰까지 다 끝났는데 여름방학에 일 좀 할려고.

- 네.

- 그 용하게 어떤 인스튜트에서 스카라십을 줬어요. 그래서 유니벌시티 펜실베니아에 공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그렇지만 그게 미국 가서 바로는 아니었지요?

- 네. 한 6개월 후에 그랬습니다.

- 그럼 6개월 동안 지나시는 동안에는 상당히 고생 하셨겠네요.

-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고 또 학교 다니면서도 일정한 비용 뿐이기 때문에 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습니다.

- 그 스카라십이 뭐 어느정도 참 여유가 있는.

- 겨우 밥 먹고 학교 다니는 것 뿐이기 때문에 만이 우리가 병이 나든지 무슨 특별한 일이 생기면 꼼짝 못하게 되었습니다.

- 몇 달러 씩이나 받는거 였습니까.

- 하루에 뭐 음식 값만 3불 그 다음에 방 값 자기들이 치뤄주고 학교 등록금 자기들이 치뤄주니까 뭐 남을 돈이 있겠습니까. 또 그것이 제 날짜에 오지 않으면 대단히 곤란 했습니다.

- 네. 그러면 그런 여유없는 생활이면서도 그때 볼 것 같으면 그 고국에 보도 되는거 보면 말이지요 이 의원 이라든지 몇 분 미국에 계신 분들이 정치활동 같은것도 좀 하시는것 같고 그랬었는데.

- 네.

- 어떻게 그래도.

- 그 뭐 정치를 안할라고 멀리 떠나가고 자기 공부를 할라고 갔지만은 어디 그렇게 됩디까요. 뒤통수를 끌어 당기는것 같고 저녁이면 꼭 서쪽 하늘에 의자를 놓고 밤을 꼬박 새우고 고국 생각만 났으니 말씀이에요. 그러다가 보니까 체중이 빠지더군요. 체중이 빠지니까 치아의 구조가 달라져서 이가 아프기 시작해요.

- 아 그럼 타국에서 몸 괴로운거 제일 아주 그 고통이죠?

- 네. 돈 없는거 몸 아픈거.

- 그렇지요.

- 그건 특히 망명가가 그거에 걸리면 망명운동을 완성할 수가 없다.

- 미국 같은데 또 치료비 같은게 좀 비쌉니까.

- 아주 뭐 저는 뭐 진퇴 유격 이지요. 무슨 보험에 건강보험에도 못 들어갔고 특히 치과 같은 것은 어떻게 비싸던지. 애기 낳는것 하고 이 고치는 것은 차라리 미국 사람들이 일본에 와서 고치고 가더라도 이익이 남는다는 겁니다. 치과 비용은 어떻게 도리가 없어요. 수중에 돈은 딱 떨어졌지.

- 그러면 이 풍치라 그러셨지요.

- 그렇습니다.

- 어떻게 고치셨어요.

- 그 뭐 파격적인 방법이 생겨나더군요.

- 역시 또.

- 네.

- 어떻게.

- 그 내가 모르모트가 되었습니다.

- 아니 모르모트 라니요.

- 뭐 대담하게 또 배짱으로 그 펜실베니아 대학의 총장을 만났지요.

- 아.

- 그 내가 여치 여치 하다.

- 네.

- 돈은 없다. 그러니 이가 아파서 학교에 못 다니겠으니 어떻게 도울 길이 없느냐 그랬더니 이 사람이 각 자기 스탭 멤버를 찾아가지고 연락 하더니 이런 기회가 있었는데 너희 응할 것이냐 치과대학 학생 연습 하는데 거기에 니가 응하면은 무료로 할 수가 있다.

- 아 실험용으로?

- 네. 그래서 이를 고쳤습니다.

- 아 그럼 아주 완전히 모르모트가 되셨구만.

- 그렇게 됐습니다.

- 그래도 다행 입니다.

- 그래서 제가 느낀 것은 이승만 박사라든지 또 마침 그 학교에 서재필 박사도 다녔다그래요. 의과에. 서재필 박사라든지 김구 선생이라든지 망명인들이 도리어 그렇게 고통을 보면서도 장수하는 이유 건강한 이유 그건 그런 환경 속에서 자기 건강법을 가지고 평소에 주의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나. 이런걸 느꼈습니다.

- 긴장도 하고.

- 네.

- 그런데 그렇게 공부 하시면서도 아까도 잠깐 얘기가 나왔지만 그 정치 활동이라 그러면 좀 어패가 있을런지 모르지만 미국에서 그 뭐 대모 비슷한 것도 하시고 그런걸로 보도가 되고 그랬는데.

- 네. 그렇습니다. 뭐 참 대모를 안고 공부하러 간 놈이 거기까지 가서 또 대모를 하게 되었으니 그게 내 팔자소간이라고 그랬습니다만은.

- 네.

- 그것은 박정희 씨가 몇 번 건의를 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에 나온다고 했다가 안나온다고 했다가 그 63년 3월인가 4월 그때.

- 그렇지요.

- 아주 그건 뭐 어지러워서 우리들도 ..이 자꾸 나는데 뭘 대중을 잡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몇이 모여가지고 거기 학생들이 유학생들이 자기들이 이 군은 빨리 민정 복구를 하고 군은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라고 대모를 한다 그래요.

- 네.

- 그래서 우리가 그 준비를 해주마 해서 월타 박 집에 박원기 씨 라고 우리 워싱턴에 교포가 있습니다.

- 네.

- 그 집에 이제 저하고 양일동 씨가 그때 마침 일본서 왔어요.

- 네.

- 최경록 씨도 있었고 정기용 박사도 있었고.

- 최근에 돌아온 최경록 장군.

- 네. 그 분들 하고 같이 의논해서 요새 그 연필이 매직팬인가 뭔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 가지고 피켓을 만들었지요.

- 어디서요.

- 월터 박 집에서.

- 네. 그 뭐 그때 대모라면 무슨 우리는 플랜카드 생각 하는데 그 뭐 대모판이 어떤거였어요?

- 그 조그만한 광고판 같은거 있잖아요. 네모 반듯한 박스 같은거 그정도 입니다.

- 아.

- 그걸 가지고 대모를 하면 경찰에 보고만 하면 됩니다, 언제든지.

- 네.

- 그렇지만 그 대모가 재밌는 것이 백악관 앞에서 하게 되면은 일정한 지경에 일정한 시간 동안을 보고를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데 다만 이것이 지체하면 안됩니다. 일정한 페이스로 걸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그 불법이 돼서 대모가 해산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대모는 학생들이 한다고 해서 우리가 준비해 줬더니 학생들이 어떠한 수로 마취가 됐는지 간에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그 아마 그 대사관들이 능열적인 공작에 의해서 학생들 대모를 못하게 한 모양이에요.

- 아.

- 우리는 학생 지원을 해주러 갔다가 우리가 해야지 이건 학생들이 안하면 우리가 할 수 밖에 없지 않냐. 특히 망명한 사람들이 춘추자 명으로 자기들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말이오.

- 네.

- 그 하기가 대단히 거북 했지만은 그땐 퍽 심각 했습니다.

- 네.

- 그래도 그 슬로건은 왜 군인은 정치에서 물러가고 군정을 완전히 종식해서 민정으로 해라. 이 슬로건을 가지고 대모를 했던 것입니다.

- 백악관 앞에서 그러니까 멈추지 않고 왔다갔다 걸어다녔겠군요.

- 그랬습니다.

- 몇 시간이나 하셨댔어요.

- 한 두시간 하고 또 백악관 앞에서만 할 이유가 뭐가 있냐 그건 뭐 그 사대주의가 아니냐 이래서 그건 그렇지 않다 미국 사령관이 총사 팔군 사령관이 대통령이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 미국.

- 음.

- 또 팔군 사령관은 한국군에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 군의 문제에 관해서는 백악관에서 해야 한다. 그러고 바로 정일권 씨가 당시 그 워싱턴 대사 였습니다.

- 네.

- 그 대표가 정일권 씨 한테 찾아가서 우리의 요구 조건과 우리 결의문을 주고 본국 정부에 전달해 주시오 하는 것을 엄격하게 우리가 얘기했던 것입니다.

- 그 미국에 가서도 대모를 하고 또 자유당 때도 대모 많이 하셨지만 하여튼 대모로는 마스터 한 셈이시구만.

- 아 그렇습니다. 근데 마침 그 또 한가지 내가 재밌는 얘기가 있어요.

- 네.

- 여기 지금 원내 총무 공화당 원내 총무 김동완 씨가 있어요.

- 그렇지요.

- 그 분이 내가 있는 뉴헤븐에 와서 우리가 정치 정화법을 해지 해주고 민선을 회하겠는데 이 형 같은 분은 장관한 일도 없고 또 반공했고 무슨 부정축제 한 일도 없고 그러니만큼 신청을 하면 먼저 풀 테니까 신청 좀 해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해요. 또 동시에 이 형은 좀 국내에 들어가면 어떻겠냐고. 그래 내 얘기는 여보시오 내가 민주주의 한다고 이제까지 국민들한테 큰소리 치던 사람 또 내 협조를 많이 받고 신세를 진 사람이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투쟁 한 사람이 군정대 가지고 탈권 당했는데 무슨 뜻으로 국내에 들어간단 말이오. 그거 하나 공부하러 온 놈이 정치하는 사람이 잘못하면 그 책임이라는 것은 사형을 당하는 것 보다 더 무서운 책임이 남을테니 난 정치에 아주 골머리 나쁘니 공부나 해야겠소. 그런 얘기로 피했습니다.

- 그때 그 후엔가 김종필 의원이 외유 했을 때도 아마 이 의원 만났던 걸로 알고 있는데.

- 그렇습니다. 김종필 씨가 그 워싱턴에서 와가지고 그 ...있었어요. 김동완 씨 공사에서.

- 네.

- 자기가 뭐 여러가지 얘길 합디다. 얘길 하고 학생들 모아놓고 연설을 해요. 내가 인제 얘기 듣다 말고 보니까 독도를 뭐 일본 사람과 얘기해서 폭파 해버려야겠다 그러길래 내가 여기에 허허 큰일났군 말이야 앞으로 심상치 않군 이런 생각 하면서 그 시간에 김종필 씨 보고 만나서 너 그 당신은 말이오 이번 정치 정화법에 죄 없는 사람 더군다나 그 소장파들 그 ... 최후까지 안 풀어주고 최후까지 파업하.. 허니 이거 어떻게 되는거냐 이것 좀 해결해 주시오 그랬더니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고 밑에 사람이 그런 거라고 가서 잘해 보겠다 이런 얘기를 합디다.

- 미국에 한 1년 계셨다 오셨죠?

- 한 2년 가까이 있었습니다.

- 저 미국에서 고생하시던 얘기니 뭐 재밌는 얘기가 많겠습니다만 우선 최근 얘기는 이정도로 듣고 내일서부터는 이 의원의 그 지난날 그 해방 직후라 그럴까요 그 학생시절 얘기 학생운동의 아주 대표자 격이시니까 그 얘기를 좀 들려 주세요.

- 그럽시다 그럼.

(입력일 : 200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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