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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창랑 장택상 편 - 제17회 기미년 미국에서 발간된 잡지
창랑 장택상 편
제17회 기미년 미국에서 발간된 잡지
1965.03.01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오늘은 그 서른 아홉번째로 기미년 미국에서 발간된 잡기 독립 얘기를 역시 전 국무총리였던 장택상씨와 신동준 동아일보 정치부장의 이 얘기 저 얘기로 들어보시겠습니다.

오늘은 3·1절입니다. 3·1절을 당할때마나 늘 우리 선각자들이 기미독립운동 하던때의 얘기가 생각납니다만. 창랑 선생님 기미년에는 어디 계셨었습니까?

- 영국에 있었죠. 3·1절을 영국서 당했고. 고 다음달 4월이죠? 고 다음달 4월에 요전에 잠깐 비치긴 했지만, 이박사가 구주에 있는 한국 유학생을 미국으로 전부 소집을 했습니다.

네. 그 얘기 나왔죠.

- 그때 영국에 있던 사람이라곤 나하고 고 이관용박사. 지금 이북에 6·25때 이북에 납치돼갔습니만 민규식군 그 분이 캠브리지대학 출신입니다. 그 세분 뿐인데 그 때 이관용박사는 서서 갔구요. 4월달인데 기미년. 나하고 민규식군 밖엔 없었는데 그 때 민규식군이 인플루엔자로 그 때 독감이 처음 시작해가지고 구라파서 그 수만명이 죽고 그랬습니다. 그 분이 거기에 걸려 가지고서 병원에 입원해 있고, 그래서 나혼자 응소를 했지 말하자면.

그 때 미국에서 겪으신 얘기를 들려주실까요?

- 글씨요. 응소를 해서 이제 뉴욕을 가니까 이승만박사가 그 때 그 포티 세컨 스트리트에 매컬핀 호텔이라고 있어요. 그게 그냥 계시고. 우린 요전번에 잠깐 얘기했던가요? 조병옥군 얘기할 때 내 어디서 만났다는거. 한국사람이 경영하는 음식점이야. 조그맣던 음식점인데 거기서 늘 우리가 회합을 하고 이랬는데. 서재필 박사가 필라델피아라는데서 인쇄소를 크게 하시고 계시더군.

아. 직접 경영으로.

- 그 양반이 그걸 아주 여러해 동안 그 양반이 의삽니다. 의사를. 병원을 하시다가 아마 실패를 하셨는지 어땠는지 내 잘 모르겠습니만, 좌우간 그건 걷어치우고 인쇄소를 크게 하시고 계세요. 상당히 컸습니다. 인쇄소가. 그 서박사 부인이 미국 부인이신데. 미국 육군 소장의 따님이고 좋은 집안 입니다. 옛날부텀... 그 양반이 인쇄소를 이용해가지고 잡지를 발간하자. 신문은 우리가 할 수 없다. 자금관계로. 잡지는 발간하는데 우리는 돈을 모두 거출해라. 아 아시다시피 미국에 있는 우리 학생들이야 뭐 전부 고학생인데 뭐 거출할 수가 있나요. 그래서 내가 좀 내고. 내 냈다는게 그 뭐 조족지혈이지. 형편없는 거지만. 서재필 박사가 주동이 되서.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은 1년에 국세 바치듯이 다 세금을 바쳤습니다. 그 때. 아주 영수증 떼주고 아주 국세를 바쳤어요. 이박사한테. 이박사...을 통해서 꼭 국세를 바쳤었어요. 거기서 이제 또 거출하고 이래서. 인디펜던스라는 잡지를 독립이라는 우리나라 말로 하면 잡지를 발행해서 그 잡지가 미국사람... 한테 잘 팔렸어요. 그래서 그 때 교정을 누구 누구 봤냐 하면 그 때 이 해방 직후에 여기 나왔다가 일본 건너가는 길에 미국 군용기로 갔죠 거기가. 그래서 그 하꼬네 그 산에서 비행기가 걸려 가지고 그걸로서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비행기가 전부 대파되고.

누구요?

- 전경무라고. 전경무라고 그 때 여가 배제학교하고 이화학당인가 그 때는 그 해방전에는 그런 이름으로들 있지 않았어요? 선생노릇도 하고 그랬습니다. 전경무가. 영어 잘하고..

미국에선 뭘 하고...

- 그 분이 미국 대학을 다닐때 미국 전국 총학생연맹의 회장까지 지냈어요.

그러니까 저 한국 사람...

- 한국사람으로.

한국 사람 회의...

- 아닙니다. 미국사람. 전 미국대학 총연맹이에요. 학생.

상당히 출중했겠군요?

- 출중이.. 여간아니죠. 전 대학 웅변대회에서 그 분이 여러번 일등을 하시고. 그런데 전경뭅니다.

애석하게 돌라가셨군요.

- 아. 애석하고 말고. 이북사람이죠. 평안도 친군데. 그 분하고 나하고 유석하고 셋이서 교정을 봤습니다. 인디펜던스.

기미년 그 햅니까?

- 바로 스 해죠. 기미년 4월달이죠.

그러니까 그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미국에서 여론화 시키자 하는 운동이었겠군요.

- 미국에 우리 기미 운동의 말하자면 연장이지. 한국에서 일어난 기미운동의. 그 연장으로서 우리가 재미 학생들 전부 지방으로 다니면서 유세하고. 또 우리는 독립이라 잡지. 그 서재필 박사 주관으로 독립이란 잡지를 발간해가지고 미국사람들에게 그렇게 돈 안받고 그대로 돌렸습니다.

그 첫호가 이제 언제쯤 나왔습니까?

- 그 첫호가 5월 16일인가 될겁니다. 난 그 잡지 교정보다 한 3개월되고 도로 학교 복귀를 해서 영국으로 도로 갔으니까. 그 잡지가 좌우간 한 2개년 계속 했습니다.

월간으로...

- 아니. 주간이죠. 주간으로 한 2개년을 계속하다 그 뒤에 이제 서재필 박사가 재정적으로 그걸 계속할 수 없고 또 이박사 그 국세받는 돈으로서 거출도 하고 했는데, 그 돈이 그대로 그렇게 당해갈 수 있나요? 그래서 그게 피해가...

창간호 때는 어느 분이 집필을 하셨었나요?

- 그 때 여러분이 했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납니다만 제 일호에 이승만 박사가 에디토리알 사설을 쓰시고 그 다음에 서재필 박사가 또 에디토리알 두 분이 썼어요. 두 분이 쓰셨죠.

발행인이 서재필 박사니까. 주간이 아마 이박사쯤 되겠군요.

- 이박사는 이름은 안 얹혔습니다. 파블리셔하고 에디터는 말하자면 발행일 하고 편집주임은 서재필 박사 명의로 그렇게 돼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랑 선생님은 뭐 글 안쓰셨어요?

- 나도 쓰고 유석도 쓰고 전경무도 쓰고 다 썼죠. 영어 좀 쓸 줄 아는 사람은 그 때 다 썼죠. 그 아마 지금 어디 찾으면 우리나라도 그게 들어왔을겁니다. 내가 환국해서요. 영국서 환국해서 보니까 내 친구가 그거 가지고 있는거를 내가 봤어요. 우리나라 그러니까 아마 비밀이 그 때 일본 사람들 까닭에 공공연하게 들어오진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다 여기에 들어왔어요.

미국에서 아마 뭐가 발간된게 그게 처음 아니겠어요?

- 처음이죠. 왜? 이 저 샌프란시스코 ..하고 하와이서 신한민보하고...

그것도 영문?

- 아니요. 그건 한글로. 지금까지 계속 아마 그게 있을겁니다.

영자판으론 그게 이제 처음이었죠?

- 영자판으론 인디팬던스 주간이 처음이죠. 말하면 한국에서 일어난 기미운동의 연장으로 미국서 선전목적으로 그게 발간된거니까.

그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잡지가 영문으로 해외에서 발간 됐는데, 지금 현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 대사공관 같은데서 선전물로 나오긴 하지만. 무슨 그런 정기 간행물로 나오는건 지금 현재 없어요.

- 지금 한국정부가 외국에 선전하는 방식을 보면요. 글쎄 내가 지금 잘못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 기미운동때에 미국서 재미학생이라든지 그 분들이 활약하던 그걸로 봐서는 못 따라 갈겁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민족적 얼이라고 그럴까요. 그런거에 의해서...

- 열광적이였죠. 네. 열광적이에요. 또 한가지 한심스러운 일은. 이 국내에서 봐도요. 우리의 국가에 대한 관념이 말이야. 기미운동때 그 국가관념만 좀 뒤떨어지지 않았는가. 이런 감이 있는 것이 퍽 한심스럽다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뭐 3·1절. 오늘도 3·1절 입니다만은 3·1절마다 상기하자 3·1정신 3·1정신하지만 말로만 구호로만 그랫지 실제로 그게 참 어려운 일이죠.

- 말로만 가지고는 잘 안되요. 실행을 하는 것이 참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때 그 처음 창간된 그 독립잡지는 크기가 얼마나 된 거고 분량이 어느 정도 였어요?

- 크기가 요전에 저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던 태평이라는 잡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 잡지 사이즈만 해요. 그 잡지가 신동아보다는 갑절큽니다.

그럼 타블로이드 판이로군요.

- 네, 타블로이드 판인데, 그게 갑절 커요. 크고 뭐 참. 지질이라던지 인쇄라든지 그건 뭐 미국서 했던거니까 훌륭했죠.

그 때 첫 창간호는 몇 부나 ...

- 창간호 내가 지금 잘 기억은 안납니다만, 그 때 서재필 박사 인쇄업을 하고 있어서 그 분이 또 저 물질적으로 상당히 풍부했어요. 그게 아마 3만분가 그 때 발간했어요. 그래서 전부 무료로. 무료로 미국의 각 정치단체, 사회단체, 정부 각 부처 그대로 학생들이 그냥 갔다 그냥 돌리고. 각 도서관에 다 돌리고. 또 구라파 각국 대학 도서관 뭐 이런데 다 무료 배부로다 우송했으니까.

삼만부면 상당한 부수죠.

- 아. 상당한 부수죠. 서박사가 그 인쇄소를 가지고 상당이 오버했다는데 그 인디팬던스 독립 주간 잡지 까닭에 그 분이 망했다고 해도 가하죠.

그 때 국내선 3·1운동으로..

- 아. 참 한가지 그저 기억납니다. 이 동아일보에다가 서재필 박사가 동아일보 지금 찾으면 그게 있을 겁니다. 동아일보에다가 참 공한을 냈어요. 고 인촌의 명의로. 이 독립잡지를 계속 하도록 도와라!

국내서 좀 서포트 하도록.

- 해서 그게 참 동아일보 그 때 동아일보 찾아보면 그거 있을겁니다. 편지는 그대로 동아일보서 기재되가지고 있어요. 그 내가 봤으니까요.

그럼 저 오늘은 3·1절이니까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내일은 또 어제에 이어서 미국에 계셨을때 얘기 좀...

(입력일 : 200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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