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후 20년, 흘러간 역사의 물결에서 새 좌표를 찾아보는 정계야화. 오늘은 서른 네번째 대구 피난 때 정부소재성명이 나오기 까지를 장택상 씨와 신동준 동아일보 정치부장과의 대담으로 들으시겠습니다.
- 네. 어저께 말씀해 주신대로 오늘은 그 저 창랑 선생님이 그러니까 국회 부의장으로 계실 때 얘기가 되겠군요. 그 6·25 때 대구 피난 때 얘기, 그 얘길 좀 말씀해 주세요.
- 6·25 동난 때 우리가 남하 하기 시작 했는데 전전에서 부산까지 가지 않았어요? 여기서 남하 해서 대전으로 갔다가 대전서 또 전주로 쫓겨 갔다가 또 도로 대전으로 와서 또 인제 퇴거 명령을 군으로 부터 당해서 대구로 가던 그 동안 얘기 라는건 그건 뭐 한달 해도 부족하고 두 달 해도 부족 합니다만 거두절미 하고 그 요점을 따서 하나 얘기 할 것은 그 때 인제 대구를 가니까...
- 맨 첫 번엔 대전을 갔지요?
- 네. 대전 갔습니다. 해공이 그 때 의장이고 내가 인제 명색이 수석 부의장이고 그 때 죽산이 조봉암 그 이가 인제 부의장이고 그런데 벌써 해공하고 죽산 뭐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없어 졌어요.
- 아 서울서 부터요?
- 서울서 또 그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건 제가 시간이 없어 그만 두겠습니다. 좌우간 대구 가니깐 없어요. 의장 둘이 다 없단 말이야. 그래 인제 간신히 이제 국회의원들 모두 소집해가지고 여관마다 찾아 다니면서 붙드니까 한 40명 돼요. 대구 그 도청 한 모퉁이를 인제 우리가 얻어서 임시국회로 삼고 그러자 인제 8·15가 다 왔단 말이야.
- 네.
- 그 때 까지 우린 이 박사가 대구에 있는지를 전혀 몰랐지요.
- 아 창랑 선생님 자신도 모르셨어요?
- 몰랐지요. 그렇지. 뭐 전부 소재지를 몰랐지. 대전서 떠나 가가지고 어디 갔는지를 몰랐지. 그 때 마침 거기 8월 14일 저녁 입니다. 인제 내일이 8·15 아닙니까? 말하자면. 그 밤에 인제 그 이 박사가 대구 인제 지사 관저에 와 계신다는 말을 듣고 쫓아 갔지요. 그 이튿날 식전에 8·15 새벽 입니다 그려. 쫓아가서 그 참 인사를 여쭙고 정부 소재를 국민에게 안 알리고 이거 어떻게 됩니까. 아이 모두 정부 소재를 지금 알리면 안된다. 그거 무슨 말씀 입니까. 정부가 이 만민정부 아니기 때문에 정부소재를 가르켜야지 선생님 이렇게 해서 안됩니다. 빨리 선생님의 귀속을 정부가 임시정부가 대구에 엄연히 건재 하다는걸 국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이 양반하고 장시간 논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이 좋다고 이래서 즉시 비서를 불러서 신문에 그걸 발표를 하고 자기도 그 날 오전 10시에 도청 회의실에서 8·15 행사를 국회가 거행 할 테니까 당신도 꼭 참석 하겠다는 승낙을 받아 가지고 그래 인제 행사를 진행해서 대통령도 나오시고, 외교 사절단을 모두 찾으니까 다 어디로 가 버리고 초대 대가 그 중국 대사 그 소육련 씨가 대구에 와 있어요. 그 여관에 가서 이제 그 분에게 얘기를 하고 이제 나오라고 하니까 그 분이 나왔더군요. 그래 인제 그 행사를 했지요. 행사를 했는데 그게 지금 생각해 본 점이요. 누가 이 박사에게 진언 했는지 대구에서 정부소재를 가리키면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 때 인민군이 대구로 집중해서 내려오고 또 전라도로 한편 그 장항으로 해서 내려 갔던 인민군이 즉시 저 대구로 향해서 진군한다 이러니까 정부는 일단 부산으로 간 뒤에 국민에게 밝히지 대구서 밝혀가지고 위험하니 이렇게 누가 잘못 그 어른께 아마 진언한 모양 같아요. 그래 내가 그럴 수가 없다. 지금 가뜩이나 지금 민심이 황허 한데다가 정부 소재를 밝히지 않으면 정부 없어진 줄을 국민이 알지 않냐. 이거 큰일이다. 정부 없는 국회가 어디 있냐. 그러니까 빨리 밝혀라. 이래서 인제 그 어른이 참 그 날 15일날 8월 15일날 아침에 정부 소재를 밝히시고 그 8·15 행사 오전 10시에 나오셨던 겁니다. 도청 회의실로 나와서 참석을 하셨지요.
- 네. 그 때만 하더라도 일반 국민들이 정부 소재도 몰랐고.
- 아 저 일반 국민 보다도 소위 국회 부의장이 몰랐고 국회의원이 몰랐는데 뭐 말할게 있나요?
- 그 땐 또 국회 소재도 인제 물론 몰랐지요 일반 국민이.
- 네. 그런데 그 한가지 따라서 내가 하나 밝혀 둘 거는요.
- 네.
- 지금 대구선을 고수한 점에 대해서 유석이 공로를 참 유석의 공로를 많이들 일컫고 있고 또 그것도 사실이고 당시에 또 내부장관이고 이런데.
- 조병욱 박사요?
- 네. 한가지 숨은 공로자가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을 내가 퍽 유감스럽게 생각 하는건요. 그 실정은 이렇습니다. 내가 하루는 여관방에 앉았으니까 그 때 국회의원의 황성수 씨가 쫓아 왔어요. 와서 `큰일 났습니다.` ` 왜 그러우?` `지금 뉴욕 타임즈 기자 존스를 만나니까 8군 사령부에서 울산으로 전부 외국 기자들은 울산으로 즉각내로 퇴거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니 이게 몇 시 안에 UN군이 남하 하는 모양 같습니다. 대구를 포기 한 것 같습니다.`
- 아 그 때 전군기자들 말이지요?
- 그렇지요. 아 여보오 이거 큰일났소. 대구를 포기 하다니 이거 무슨 소리요. 갑시다. 그래서 그 경산 나가는 길 입니다. 옛날 일본시대 때 그 대구 연대 군 이에요. 그래서 인제 그걸 황성수 군 하고 쫓아 갔더니 워커 중장이 거기 있더군요. 그래서 참 한 1시간 반 2시간 채 못됐습니다. 항쟁을 했습니다. 대구선을 포기하면 이건 내가 대한민국을 갖다가 인민군에 그냥 갖다 바치는 거다. 안된다. 항쟁을 했더니 잠깐 그 즉시는 수그러져요. 그러면 우리가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외국기자를 울산으로 퇴거 하라는 이걸 취소 해다오.
- 네.
- 그래 멈칫멈칫 하더니 부관을 부르더니만 취소해라.
- 네.
- 근데 그날 챔퍼니가 부관 이에요. 지금은 그 사람이 준장 이라고 금년 크리스마스 때도 내게 카드가 왔었더만 그래 그 사람이 들어와서 그 취소 명령을 기자 퇴거 취소 명령을 받아 가지고 그 자기 말이 대구 지키겠다. 그 소리를 내가 지금도 귀에 쟁쟁 합니다. 그게 황성수 의원의 공로 입니다. 그 이튿날 유석이 폭음을 내더군요. 내무석을 사수 한다.
- 아 그 때 그랬어요?
- 네. 아니 그걸 지금 황성수 씨가 지금 외국 기자에게 뉴욕 타임즈 특파원에게 그런 소문을 못 들었다면 어땠을런지 그 사람들 그 저 퇴거 라고는 그 뭐 전광석화 적입니다. 참 외국 기자들 퇴거 명령을 황성수 씨의 정보에서 우리가 가서 만류해서 그게 참 취소가 되고 그 사람들이 대구를 사수 하겠다는 그런 결정을 보고 그 황성수 씨가 세상 알려지지 않고 있어요. 그걸 내가 퍽 유감스럽게 생각 합니다.
- 그리고 그 또 창랑 선생님이 정부 소재를 밝히도록 진언 했다는거 그것도 또 하나의.
- 정부 소재 밝힌게 뭐 당연한 일이지. 그거는 공로 될거 하나도 없습니다. 정부가 어디 행방불명을 하듯 그렇게 자취를 감춰 가지고야 어떻게 전쟁을 해나가며 또 민심이 안정될 수 있는 그거는 될 수도 없는 얘기구요. 황성수 당시 그때 참 국회의원 황성수 씨가 그 외국 신문기자 한테 울산으로 그 날 오후에 퇴거 명령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즉시 활약 한거, 나도 그 때 가기 따라 같이 갔습니다만 또 그 분이 영어가 능란한 분 이니까 그 공로가 크다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 그 때만 하더라도 그 8·15 경축식 같은걸 할 엄두도 내기 어려웠던 때 아니었어요?
- 엄두도 내기 어렵지. 한 가지 일화 잠깐 얘기 할까요?
- 네.
- 처음에 여기서 수원으로 갔습니다. 밤에. 그게 26일날 오후지요. 가니까 평택 쯤 인제 갔습니다. 수원서 떠나서 가니까 해공이 광주 쪽에서 나온단 말이에요. 해공이. 의장 차를 타고.
- 광주 출신 이시니까.
- 해공이 그리 나올 이유가 없거든요. 그래 내 차를 멈추고선 해공차를 쫓아 갔지요. 여보오 해공. 국회의장이 그 무슨 일이오 그러니까 창랑 날 몰라. 아 모르다니. 아 내가 중국에 있을 때 그 군벌놈들 싸움 하는데 아 내가 달아 나는데는 내가 선순데 창랑 알지도 못하고 이래. 난 벌써 어제 떠나서 광주 다녀서 지금 오는 길인데. 이래서 우리가 ... 흩어진 일이 있습니다만. 군번 난리에 아주 도피엔 선수라고 자기가 자초를 하고.
- 그러나 해공은 또 저 광주가 출신구이고 보면
- 그렇지요. 출신구지요.
- 거기에 일이 또 궁금 하시고. 거기에 무슨 조치를 취하시고 오느라고 그리로 다니신건지도 모르지요.
- 그 해공 그것만해도 몇일 얘기해도 그 남을 뉴스 입니다. 해공이 말 할 수 없어요. 그렇게 여유가 또 작작하고.
- 네.
- 네. 그 사람 뭐 완급은 참 잘하는 사람이야. 급해도 급한 줄도 모르고. 무슨 또 그런 도련한 그런 그 사변 당해야 뭐 근심 걱정 그런것도 아주 그것도 참 조금도 그런 위급함의 표장이라곤 내보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 같은 부의장이던 조봉암 부의장도 그 때 또 보이지 않았고.
- 그 사람은 대전 가서 만났습니다.
- 아 대전이요?
- 네. 대전 가서 만났는데 한 가지 그것도 일화가 있지요. 대전 가서 인제 이 박사가 6·25 전쟁이 나고 국민에게 사과문을 내지 않았습니다. 나하고 해공하고 죽산 하고 임시 관저를 갔지요. 그 주사 지사 관저지. 가서 국민에게 사과문을 내시오. 서울을 지키지 못했다는 관계로. 아 내가 당덕죄 이냐고. 내가 왜 ... 내가 뭐 잘못이야. 인민군 들어오는거 내 과실 이냐고 아 이 양반이 소리 소리 질러서 우린 그 무안해서 뭐 한 마디도 못하고 나왔지요.
- 그러나 아마 그 때 그 수도 시민에게 말이죠. 절대로 사수 하니까 움직이지 말라 이런 포고를 내리고서는 정부만 내려간건 그 때 아마.
- 그건 정부 죄고 그건 이 박사만 죄과가 아닙니다.
- 네.
- 국회도 사수 하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26일날 아침 1시 반 입니다. 국회도 사수하던 결의해 가지고 그 이튿날 다 도망 쳤으니까. 그 뭐 하필 뭐 정부에만 책임 돌릴 수 없어요.국회, 정부 공동 책임 져야지요.
- 그건 아마 역사에 남을 큰 잘못으로...
- 그건 잘못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민군이 그렇게 급속도로 들어오는 걸 귀신인들 누가 알았나요? 국군의 참 그 정비가 잘못 됐다는거 우리가 무력이 불충분 하다는거 이거지요.
- 알겠습니다. 또 나머지 얘긴 내일 듣기로 하지요.
(입력일 : 200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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