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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창랑 장택상 편 - 제9회 인촌 김성수 선생
창랑 장택상 편
제9회 인촌 김성수 선생
1965.02.19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해방 후 20년 흘러간역사의 물결에서 새좌표를 찾아보는 정계야화 시리즈. 오늘은 그 서른번째로 어제에 이어서 인촌 김성수 선생 10주기를 맞아 지난날 인촌 선생의 인품을 그리는 이 얘기 저 얘기를 장택상씨와 신동준 동아일보 정치부장의 대담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어제는 저 인촌선생님 소년시절이라고 그럴까요? 그 동경 유학생시절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오늘은 그 후에 말씀을 계속해서 좀 들려주십시요.

- 네. 내가 아까 아까보담도 어저께지요 그러니까. 잠깐 비췄습니다만, 그 와세다에 있다가 합병되든 합병호외가 나는것을 보고 즉시 내가 일본 떠날 생각이 나서 영국으로 가는 길에 상해를 들러서 지금은 소련입니다만 그 때는 아라사라고 우리들이 말했는데 그래서 그 아라사로 해서 영국으로 해서 독일로 갔습니다. 그 때 이제 영국서 있다가 본국을 오니까 인촌이 벌써 나와 계세요. 계서서 그 때 동아일보가 창간이... 창간총회를 마치고.

그게 그러니까 1920년 되는군요.

- 그렇죠. 그 20년인가 1920년인가 21년에 좌우간 그 일제로는 대정 9년입니다 그게. 대정 9년이 됐고... 6월달인가 내가 나왔는데. 그 때 인촌이 내가 그 때 수표동... 지금 집이 아닙니다. 동네 이름은 같습니다만 딴 집. 수표동 집에 와서 인촌이 영남일대 주는 너 좀 맡아라.

아. 동아일보 주?

- 네. 그래서 내가 이제 인촌의 부탁을 받고 내가 사흘인가 나흘인가.. 지금은 오래되서 기억은 안 납니다만, 내가 떠나서 경남북을 한 20여차례를 돌아다녀서 주를 모았지. 영남주를. 그 때 서상일씨라고 ...습니다만 나중에 동아일보 지국장도 하고 애국지사고 서상일씨가 대구시내는 전부 서상일씨가 맡고 ... 소위 유림.. 유림들이 많이 살잖아요? 경남북에. 그 유림문중으로 돌아다니고... 그래서 이제 그랬는데 그 때 일이 하나 기억나는 거는 그 때 이제 동아일보 처음 창간돼가지고 정치부기자 장덕준씨라고 있었어요. 그 서산의 ..니다. 그 분이 이제 정치부기잔데. 아 정치부장입니다. 그 때. 그 때 이제 저 미국의원단이요 미국국회의원이죠 그러니까. 의원단이 한 20여명이에요 좌우간. 구라파를 경유해가지고 중국을 거쳐서 이제 한국을 우리 조선을 거쳐서 일본으로 해서 이제 미국으로 들어가는 그런 길. 노정길 짰는데. 그 때 이제 봉천에 와서 하룻밤 잔다는 얘기를 듣고, 그 때 그 장덕준씨를 동아일보에서 특파원으로 보내서 미국의원단에게 우리나라 그 형편이라든지 모든것을 좀 하소연 해보까 그게 기미운동 직후니깐 아직까진 혹 희망이 없나. 이런 그저 참 일우지망이라도 우리가 다 가졌댔거든요. 설마 설마 하는 그 쓸데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래 장덕준씨를 보내는데.

그 때만하더라도 그러니까 어떤 신문 뉴스보도 보다도 일종의 민족적 사명이랄까 이런걸 맡아가지고 가게됐겠군요.

- 그거죠. 신문이 독립을 위한 신문이요. 공장이 독립을 위한 공장이요. 모든게 그저 독립 그게 표준입니다. 지금 무슨 경성방직이 돈벌이하는 경성방직이 동아일보가 무슨 부수를 많이 늘려가지고 회사가 부자되고 그게 아닙니다. 지금 사고방식하고 그 때 사고방식이 180도로 다릅니다. 그저 독립. 독립의 한 도구로 되가죠. 그러니까. 그 때 인촌이 밤 10신가 쫒아 왔어요. 내 집으로. 지금 내 사는 수표동집이 아니고 고 조끔 떨어진데. 와서 장덕준이를 낼 봉천으로 보내야 겠는데 나도 여비를 좀 줬는데. 너도 돈 좀 내라. 그래서 내 그 때 돈으로 500환은 냈지. 그래 인촌보고 돈이 좀 넉넉해야지. 의원단을 만나면 같이 좀 봉천서 봉천호텔이라고 있으니 거기 유한다니 파티도 하고 해야한다. 정치부장아니냐. 하니까. 얼마줬냐 하니까 자기 말로는 1,200원 줬다고 그래요.

1,200원?

- 네. 원이죠. 그 땐 환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땐 원이죠. 이조때 환이지. 그래서 1,200원하고 500원하면 1,700원 이니까. 그 때 큰 돈이거든. 기가막힌 돈입니다. 그래서 이제 장덕준씨가 떠났단 말이야. 봉천 도착하기 직적에 중간에 어디서 일본헌병이 쳐가지고 총살를 했는지 타살을 했는지. 지금까지 시체까지 못찾지 않아요? 행방불명입니다. 어떻게 됐는지. 죽은줄로만 알지. ..다시 함흥차사로 안 돌아오니까 뭐. 근데 일본헌병 놈들에게 붙들였다는 건 거기 있는 동포들에게 소문이 흘러나와서 참 이심전심으로 이렇게 들었지. 일본헌병들에게 붙들렸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없어졌는지 지금까지 모르죠.

그러고 보니 설산 장덕수 선생님 자제분이 다 비명으로 돌아가시게 됐구만요. 결국.

- 장덕수씨는 우리손으로 죽었고.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죽었고. 장덕준씨는 우리의 원수의 손으로 죽었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또 저 인촌선생님이 동아일보 쭉 하시고 그래가지고 일제 말기까지 참 꾸준히 항거하시느라고 참 여러가지 말씀도 많을꺼 같은데...

- 인촌이 그 때 그 한가지 우리가 기억해 둬야 할 것은 말하믄 그게 해방전 이태전입니다. 해방전. 그 때 이제 이자들이 어떤 포섭을 했는고 하니. 조선총독이 이제 우가끼땝니다.

우가끼 총독.

- 맨 끝장으로 왔던 아베 전이지. 우가끼때 우리나라 유수한 명사들을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포섭할라고 갖은 계책을 다 썼지. 그 계책에 끌려간 분이 참 아깝게도 윤치호씨 오세창 선생 그리 되었어요. 인촌을 우겨대서 집여열라고 이 자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하고 참 강압적으로 해보다가 회유적으로 해보다가. 하 인촌이 누구라고 듣나요 그걸.

그 때만 하더라고 인촌 선생님이 어저께 말씀 나왔습니다만 거 우리나라 민족적 인재의 구심점이 되다시피 했으니까 뭐.

- 아니 이걸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요. 인촌 만나고 친하고 참 ....친구들 지금도 허다하고 많이 있지만은 내의 인촌의 인상은 이거에요. 그 오척당굽니다. 그 키도 우리키보다도 적으니까 좌우간. 그 뭐 또 농을 잘하고 이 뭐 참 친구끼리 뭐하든지 이러면 말 열마디 나오면 일곱마디는 농으로 그 양반이 참 행세을 합니다. 허나 어떠한 그 대의명분에 딱 걸려서요 괴씸한 일이 있다던지 나라나 민족에 관한 그 일에 딱 봉착할 때는 서릿발 같습니다. 참. 매와 같은 위엄이라는 거는 도저히 당할수 없습니다. 당시에 친일파 거물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아깝게도 그 사람들이 일본사람들에게 참 이용을 당했다 그럴지. 그게 만약 우리측으로 돌아섰다면 참 큰 인물될 사람들... 그 이북으로 납치해간 사람들이 지사지낸 사람들이 그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인촌앞에 와서는 꼼짝을 못했어요. 난 그 고하같은 범,사자 같은이도 인촌앞에선 고개를 잘 들질 못했으니까. 그 분을 갔다가 일본귀족원 의원으로 넣을려니 인촌이 듣나요?

대겐 어떤 사람들이 공작으로 했었나요? 그 때

- 그 때 그 공작은 한국사람으로써 한상용씨라고 우리나라선 친일파론 참 거물입니다. 그 분이 인제 역할도 많이 했지만. 그것 보담도 팔목의 야기이라고 조선총독부 보안과장으로 있던 자지. 그 분이 인촌을 자주 만났... 고하, 인촌, 낭산 그 다 자주 만났습니다. 그 양반이 그 셋만 삶으면 조선반도에 대한 저희들 정책은 다 원활하게 돌아갈꺼라 하는 그러한 복안으로. 야기가 갖은 술책과 참 모든... 금전도 아마 얼마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인촌을 귀족원 의원으로 내세울라고. 인촌만 내세우면 대한제국은 합병당하고 다 없어졌지. 앞으로 새싹트는 우리 독립정신이라는건 고대로 소멸되고 만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고. 또 저희들도 그렇게... 인촌 하나의 문제니까 좌우간. 인촌만 엮어 놓으면 뭐 앞은 탄탄대로다. 한국에 대해선 더이상 걱정할 여지가 없다. 이런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건 자타가 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래 인촌을 끌어 여을라고 갖은 술책을 다 썼지.

근데 그 팔목이라는 보안과장은 결국 해방직전까지 있었던 사람이죠?

- 해방전 1년 전에 관리가 됐습니다. 그 자가 내가 한 번 만나봤습니다. 한 번. 무슨 인사해 본 적은 없고. 가연회에 갔다가 야기를 봤는데. 그 자가 한국을 6-7년 동안을 통치했습니다. 한반도를. 총독밑에 불과 경무국 과장이지만은. 과장으로서 행세한게 아니고 직무는 과장이래도.

특수공작.

- 네. 특수공작. 기밀비라는게 그 때 돈으로도 수천만원을 썼고. 또 똑똑한 자야.

결국은 인촌선생이 창씨도 물론 안하셨고. 뭐 일체 가담 안하셨...

- 그런 얘기. 창씨가 뭐야. 인촌이 창씨 했으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수립되나요?

그래서 결국 인촌선생님 일제시대 항거 여러가지 말씀도 계시겠지만 오늘은 우선 거기까지 듣고 내일은 또 인촌선생님 평상시 성품이런걸 좀 더 깊이 말씀 듣기로 하겠습니다.

- 그저 잠깐 말씀해 둘 것은 공적생활에 있어서 사회사업 또 교육사업, 뭐 정치생활 이런건 세상이 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 분이 그 재가해서 지가 하던 법도라던지 사생활에 있어서 참 시범될만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에요. 나 그걸 좀 얘기하고 싶어요. 만일 미스터신이 ....

네. 그런 얘길 좀 들려 주십시요.

- 그러면 우리가 다시 되새김도 되고

네. 여러가지 참고가 될 수 있죠.

(입력일 :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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