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후 20년 흘러간 역사의 물결에서 새 좌표를 찾아보는 정계야화 시리즈. 오늘은 그 스물 한번째로써 인촌 김성수 선생 10주기를 맞아 지난 날 인촌 선생의 인품을 그리는 이 얘기 저 얘기를 장택상 씨와 신동준 동아일보 정치부장의 대담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 오늘 아침 삼일당에서 인촌 선생 10주기 추도식이 있었고, 창랑 선생은 거기 참석 하셨겠지요?
- 네. 했었습니다.
- 그 뭐 상당히 10년 이란 세월이 흐르고 그랬는데도 역시 많은 분들이 오시고 대단히 그 엄숙 했었는데요.
- 그렇지. 그 자리에 참석 했을 때 제일 감명이 깊었던 것은 그 당시의 촬영 했던...
- 기록 영화요?
- 네. 기록 영화가 나오더군요. 근데 그 인촌께서 그 앉아서 누구하고 대화하는 이런 장면 이에요. 인촌 모습을 보니까 참 퍽 감계무량 하더군요.
- 오늘 뭐 아마 현재 사회적으로 활동 하시는 유수한 분들 아마 대한민국의 유지라는 분들은 대개 다 모인것 같더군요.
- 글쎄 내가 여러사람 추도회에 참석도 해봤습니다만은 오늘 내가 느낀것은 일괄적으로 표현 할 수가 있어요. 많이 좌익들이 오늘 그 삼일당에 모여있던 그 사람만 몽땅 들어다가 3·8선으로 넘겨 버리면 아마 대한민국은 그날 부터 문 닫지 않을까 하는 이런 느낌을 가졌댔어요. 근데 그걸 본다면 뭐 어떠어떠한 사람 이라는거는 그 자리에 다 왔던거 그래도 한 가지 우리가 깨달을 것은 10년 이라는 것이 적은 년수가 아닌데 10년 인촌 우리를 등지고 가신지 10년 뒤에도 그 많은 인사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추운 아침에도 그렇게 운집을 해서 인촌의 유덕을 추모 한다는 것은 이건 참 그 고인의 높은 심덕 이라든지 그 분의 그 위대한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한 공직이 아니고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던 일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 분은 가셨지만 하여튼 그 분이 이룩해 놓으신 여러가지 사업 동아일보 라든가 경성방직, 고려대학 뭐 중앙 중학교 이런게 그대로 지금 날로 번창 하니까요.
- 미스터 신도 대강 짐작 하시지만 그런 업적을 교육, 실업, 언론 그런 업적을 남긴 사람은 외국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허나 난 그거 보다도 미스터 신은 연령 관계로 그걸 직접적으로 체험해 보진 못했습니다만은 우리 그 때 체험은 해 본 사람 이니까 그 체험 했던 한 사람으로 얘긴데 좌우간 인촌 사시던 자택 이라든지 또 이 동아일보 라든지 학교는 뭐 별 문제 입니다만은 그 두군데는 일제 36년 동안에 우리 남북한 그 땐 뭐 남북한이 통일 된 시대니까 단 이 나라에 생을 가졌던 사람으로는 그게 우리나라 상징이요 우리 정부요 그게 우리 국회 인줄로 이렇게 다 생각들 했으니까 그게 큽니다. 무슨 동아일보, 고려대학, 그 땐 보성 전문학교 입니다. 경성방직 뭐 이게 뭐 그런 사업 한 사람이야 외국에 가면 허다 할 겁니다. 허나 그게 아니에요. 동아일보도 기업체의 동아일보가 아니고, 경성방직도 기업체의 한 경성방직도 된 것이 아니고 이게 다 앞으로 우리 국가의 기초를 장만하려는 그런 의도와 그런 정신이 거기에 내포 돼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높이 평가 하고, 또 인촌의 그 자택 이라든지 동아일보 라든지 이 동아일보는 우리 국민의 삼천만을 대변하는 그 한 기관이다 이렇게 알지 이거 무슨 기업체의 하나 신문으로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런 희박한 해서 모릅니다만 그런 의식이야 대부분 국민의 머릿속에 동아일보는 그런거다 응? 많이 변질도 됐는진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은 그런 감명을 감상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나부터도 아직까지 그게 남아 있으니까요.
- 결국 그러한 사업 보다도 사업 자체 보다도 그 민족적 인지의 구심점을 마련했다.
- 그렇지요. 그게 말하자면 참 그 소울이 그 영혼이 거기에 잠재 해 가지고 있다. 한국 혼 이라는거 우리 민족 혼 이라는거 이것이 전부 그걸로 이게 앞으로 우리가 앞으로 우리 국가 장래를 마련하는 포색이다 이렇게들 뭐 생각하지 그게 무슨 한 기업적으로 된 경성방직, 기업적으로 된 동아일보 이 무슨 요새 그 참 그건 더구나 말도 할거 없지만 학생이라는 문자를 많이 씁니다만 학교 장사 한다고 그런것이 아니고 이게 우리 국가 장래를 마련하는 이게 한 포색이다 이렇게 모두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도대체가 사고방식이 전연히 일반 무슨 실업, 교육, 언론 이런 등등의 외국에서 생각하는 그거 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 본질적으로 다르다?
- 네. 본질적으로 달라요. 그 때 처음 해 보지 못한 사람으로는 뭐라고 표현 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표현 해도 잘 머리에 새겨 지지가 않을 것이구요.
- 알겠습니다. 저 창랑 선생님이 인촌 선생님 하고는 아주 어렸을 때 부터 가까운 걸로 아는데요. 언제서 부터 친교가 계셨는지.
- 인촌 하고 친교 라는건 그 뭐 ... 할 때 부터니까 그게 내가 그 때 열 다섯, 인촌이 열 일곱 이던가? 인촌이 내게 3년 후배 입니다.
- 네.
- 그 때 1912년 인가요?
- 네.
- 그 때 이 황성 신문사 사장에 유근 씨 라고 있었습니다. 장지연 씨 보다 먼저 하신 이지. 유근 씨라고 황성 신문사. 그 어른이 이제 날 중국으로 가라고 일본으로 가라고 이런 얘기를 하다가 결국은 일본으로 가게 돼서 갔지요. 가니까 그 때 인촌이 동경에 계시더군요. 그 때 인촌 하고 같이 만나는 이가 고하 송진우 씨, 또 김양수 씨, 수년 전에 원자력 원장 하시던 김양수 씨, 또 해방 후에 금융 연합회 회장으로 있던 최태욱 군 그들이 모두 그 조도전 대학에 있어요. 나도 그 일본 말을 좀 배워 가지고 한문 지식은 조금 있으니까 영어도 조금 알고 해서 그래서 내가 조도전 대학을 들었지요. 그런데 인촌이 그 때 인촌, 고하, 최태욱 씨 그 분 그 세 분이 조도전 대학 정경부 학부에 있더군요.
- 아, 그럼 창랑 선생님 그 때 입학 하실 때 그 분들은.
- 나는 거기서 6개월을 더 예비 학교 다녔습니다.
- 예과요?
- 네. 그러다가 나중에 들어갔죠. 그러니가 인촌 그 때 2학년으로 올라가더군요.
- 창랑 선생님이요?
- 예과가 모두 2학년인데.
- 네네.
- 네. 2학년으로 올라가 고하 하고 다 한 학부에 있었으니까.
- 아마 인촌 선생 하고, 고하 송진우 선생 하고가 동기 동창 이지요.
- 동기 동창 이지요.
- 일 년 아래에 인제 창랑 선생이...
- 그렇지요. 근데 난 거기다가 그 이듬해에 합병되던 그 ..를 보고 즉시 거기서 상해로 뛰어서 소령을 거쳐서 그 땐 아바사 땝니다. 제정시대 때니까. 영국으로 갔습니다.
- 그 때 그러니까 저 인촌 선생 하고는 어떻게 저 가까운데에 계셨...
- 한 하숙에 있었어요.
- 아 하숙도 같이요?
- 네. 그 때 그 저 이 수당 김연수.
- 인촌 선생님 백시.
- 그 이는 또 우리 보다 나이가 한 두살 아래라 그런지 아주 후배 같이 그 땐 보였습니다. 일본 그 옷에도 소매 없는 짤막한 옷을 입고 그 때 그 수당도 거기 있었어요.
- 네.
- 근데 저 이 김양수 군도 그 수당하고 연배가 같아요. 그 우리보다 후배라서 지금은 같이 늙어 가니까 모르지만 그 땐 한 두살 틀려도 선후배니 상당히 차이가 나니까.
- 그 유학생 시절에 뭐 재밌는 에피소드 같은거 없나요?
- 그 때는 뭐 너무 오래돼서 잘 생각이 안나지만 한 가지 나는거는 그 때 이 그 땐 대한제국 시대 때 아닙니까?
- 네.
- 그게 을사신조약 훕니다. 금년이 을사년 아닙니까?
- 네. 60년 전이죠. 꼭.
- 우리 국치기렴 해에 오른 햅니다.
- 네.
- 그런데 이 신하가 와서 좀 기분이 나쁩니다만.
- 바로 60년 전이죠.
- 그렇지요. 을사신조약 직후인데 그 때 학무국장 유성준 씨 라고 있었어요.
- 우리나라?
- 네. 고 유억겸 군의 삼촌 되시는 분 이지.
- 네.
- 그러니까 유길준 씨의 아우지.
- 네.
- 그 때 그 대한제국 정부의 학무국장 이야. 그 때 우리나라 외교권을... 보호조약을 금년 입니다. 넘어간 60년 전 을사 보호 신조약으로 말미암아 가지고 우리가 외국의 대공사를 전부 철수 하지 않았어요?
- 네.
- 그러니까 동경 그 때 그 고지마지 라고 있어.
- 네.
- 지금도 아마 있는지 모르지만 인제 고지마지에 우리나라 공사관이 있었는데 공사가 철수 한 뒤에 대한 유학생 감독부 라고 생겼어요. 학부에서 우리나라 그 땐 지금 우리나라 문교부지만 그 땐 문교부를 학부라고 그랬습니다.
- 네.
- 학부 때 대한 유학생 감독관이라고 해가지고 신혜영 씨를 거기 갖다 뒀어요. 신혜영 씨 라고.
- 네.
- 그 때 그 유성준 씨가 본국 정부 학무국장으로 유학생 시찰을 왔단 말이야.
- 네.
- 와서 인제 우리를 그 유학생 감독부 에다가 전부 소집을 해서 한 400여명 됐습니다 학생이.
- 아 상당히 많았군요.
- 많았지요.
- 근데 한 300명 모였어요.
- 네.
- 근데 우리도 갔단 말이야. 내가 인제 이렇게 후 열에 앉고, 인촌은 나보다 더 뒷줄에 앉고 이랬는데. 학무국장이 연설을 하는데 그 때 인제 우리나라에 의병이 한창 일어날 때 입니다. 을사 보호조약 관계로 의병이 각 도에 봉기하고 있는데 아 연설중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 국내에서 지금 폭도가 봉기를 해서 정부가 지금 합력 탄압 중이라고 이런 말씀을 그 유성준 씨가 한단 말이에요. 유성준 씨가 지금 그 저 여기 유갑경 씨 있잖아요?
- 네.
- 그 아버집니다. 지금 그 유갑경 여사 라고 자유당 시대 때 하시던 그 참 좋으신 분 이지. 그 인촌이 내 옆구리를 콕 찌르더니 이 자식아 지금 듣고 가만히 있어 이런단 말이야. 아 나도 지금 폭도란 말에 지금 잔뜩 지금 울분한 채로 인촌이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콱 찌르니까 벌떡 인나서 여보오 소위 학무국장이란 인간이 말이야 의병을 폭도라 하데. 저게 무슨 학무 국장이라고 저 자식 내려오라고 소리를 질러버렸지.
- 아, 일어 서서요.
- 내가. 그 열 다섯살 먹을 아이지. 지금도 김양수 군이 만나면 제작년도 날 만나가지고 창랑은 언제든지 가다가 주사 가다야. 그 때도 열 여섯살 아 열 다섯 술 먹은 어린 아이가 학무국장을 보고서 욕을 하고 이랬다고 그런 농을 하더구만. 그 때 내 인촌의 선동을 받아 가지고.
- 인촌 선생님 그 때 부터 역시 그 뒤에서 사람을 이렇게 코치 하시는 영도 하시는 힘을 발휘 했다...
- 그렇지. 일선 보다 언제든지 후선을 택하는 그런 성격이 있다고 해서 가하지.
- 알겠습니다. 저 내일은 그럼 인촌 선생 도 그 평상시의 말씀을 좀 듣기로 하겠습니다.
- 네.
(입력일 : 2007.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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