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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창랑 장택상 편 - 제7회 조박사의 성품
창랑 장택상 편
제7회 조박사의 성품
1965.02.17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 그간 우리나라 정계를 주름잡은 가지가지 일들. 영원한 시간의 물결을 타고 흘러가버린 과거사를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그 속에 숨었던 여러가지 얘기와 새 사실을 찾아보는 정계야화 시리즈 스물 아홉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조병옥 박사의 성품에 대해서 역시 장택상 씨와 신동준 동아일보 정치부장의 이 얘기 저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 지난 15일날 조 박사 5주기, 지금도 봉선화 멜로디가 흐르고 있습니다만은 유석 조 박사의 그 행적과 또 그동안의 여러가지 성품 이런것을 말씀 듣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그 조 박사의 그 넓은 인간미라 그럴까요?

- 인간성이...

- 네. 그런 점에 대해서 좀 얘기를 해주시죠.

- 글쎄요. 어저께 그 저 이 파리에서 그 대한민국 승인 문제에 대해서 잠깐 한 에피소드로 말씀 할까 하다가 잊었습니다만은 이 대통령이 자기 방으로 내려오라고 해서 내려 갔더니 이 박사 말씀이 그 파리에서 그 저 조 모가 신문기자들이 그 발표를 쓸데없는 발표를 많이 해 이걸 제재 하라고 빨리 전보를 치라 그래요. 그 올라가서 외무장관의 승인 없이는 의사 발표를 삼가해라 이래 전보를 친 일이 있었어요.

- 네.

- 즉시 회답이 왔는데 고 글귀를 내가 지금 기억 합니다. 그게 아마 외무부에 그게 있을런지 모르지요.

- 전보로요?

- 네. 엡솔루트... 절대 복종 하겠다.

- 네.

- 근데 그게 승인 문제로 가지고 인제 3,4일 전화로 얘기가 왔다 갔다 하는데 얘기 끝에 인제 조 군이 그래요. 너는 내 경무부장 때 내 하관이고 지금은 내가 외무부 장관 하관이라서 너한테 항복했다. 이 박사 한테 내가 발표 잘 안한다고 좀 잘 말해 . 그렇게 내게 얘기해요. 그거를 가만히 검토해 보면 그렇습니다. 내가 만일 미군정 때에 경무부장이고, 유석이 경찰부장 이었더면 남한의 단독정부 서는데 큰 지장이 왔을 것입니다. 왜, 내가 유석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말하자면 경찰부 수도 수도관 그 경찰청장이 경무부장의 그 명령을 복종해야 할 거 아닙니까. 복종하긴 커녕 유석을 내가 괴롭힌 일이 뭐 한두가지가 아니야.

- 네.

- 그러니까 유석이 그걸 다 참는거야. 만약에 이게 뒤바뀌어서 내가 경무부장이고, 유석이 경찰부장이었던거 같으면 유석이 참 그 식견과 그 기식을 도저히 발견 못했을 것입니다. 유석이 다 참고, 창랑이 이러니까 다 내가 참는다. 참 그 아량을 아 베풀었으면 도저히 남한의 치한 유지도 별 문제지만 저 때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하는데 큰 지장을 가져왔을건 틀림없는 사실 입니다.

- 그 유석 조박사의 젊었을 땐 어땠습니까?

- 한 가지 유석에게 참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특히 그 우리 후진들은 그 그분이 가빈해요. 집이 어려워서 참 고학을 하고 이렇게 해 온 까닭에 금전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 아 돈이요?

- 네. 그 사람은 금전관이라는건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건 뭐냐하면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다 하는것이 그 사람의 금전관 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갖다주면 무차별하게 받고, 그 받는걸 자기가 무슨 뭐 참 생활에 대해서 보태 쓴다는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저 뭐 쓸 친구 어려운 친구 있으면 보태주고, 술 먹고 뭐 용전여수 하고 없으면 또 그저 뭐 그대로 참 형편없는 생활을 계속하고.

- 네. 뭐 저 젊었을 때 그

- 한 가지 얘기 할까요?

- 예.

- 그 저기 그 부인께서 들으시면 날 꾸중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한번 겨울에 그 11월인데 그 때 유석이 인사동 어느 하숙집에 들어 갔습니다. 그 때 그 자제 한 분이 지금 그 어느 분인지 모르겠어요. 지금 국회의원으로 한 분이 있고, 그 윤현구 내가 잘 알지오만 누군지 그 아이 둘 중에 홍역을 치르고 그 때 유석이 아주 곤란 했어요. 하루는 그 동짓달인데 11월인데 외투를 못 입고 들어온단 말이야. 그래 집에 여편네가 있다가 고만 내게 짜증을 내더군요. 왜 당신은 외투가 여러갠데 유석 선생은 외투를 못 입으시고 저러니 외투는 두고서 뭘 하느냐고 이러기에 외투를 그 자리에서 입히니 유석이 키가 나보다 큽니다. 내가 보니까 외투를 짧은 외투를 입는것이 내 습관이기에 유석한테 입히니까 무릎팍 위로 올라온단 말이야. 유석이 입어 보더니 벗어서 사랑방에다 팽겨치며 못 입을 것만 날 주나? 이런 일이 있어요. 그렇게 그 사람이 그 참 실생활에 참 단박하고 물질에 등한 하다는 그 사람 성격이 바로 그대로 드러나는 거죠.

- 그 양반이 그 성격도 호탕하지만 그래서 그 술 같은 것도 많이 하시는걸로 알고 있죠.

- 세간에서 대개 유석이 술을 좋아한다고들 알고 있지만 그 분이 애주는 해도 주량을 크지 못 합니다.

- 그렇게 많이 안드시지요?

- 네. 대개 인제 한 두 서너잔 들어가면 봉선화 노래가 나오고.

- 네. 봉선화 뭐 수 없이 부르셨죠?

- 네. 클레멘타인도 나오고.

- 메기의 노래 던가요? 그...

- 메기의 노래. 네. 그리고 인제 취기가 더하면 삼천궁녀 노래도 나오고.

- 삼천궁녀 강...

- 그렇지요. 그리고 인제 봉선화에 대해선 그래요. 그 이가 그 한 두잔만 들어가도 봉선화가 나오는데 봉선화는 여러분 아시다시피 일제시대 때 그 작곡가 홍난파가 그 봉선화를 우리 국민의 상징으로 삼고서 그 작곡한거 아니에요?

- 네.

- 유석은 일제시대 때 그 참 울분한 생각이 그대로 남아서 한 두잔만 들어가면 이제 벌써 봉선화 시작이야. 그 뭐 우리 지금 애국가 부르다시피 유석은 아주 처음 시작이 봉선화니까.

- 그 다음에는 인제 메기의 노래, 클레멘타인 그리고 마지막에 삼천궁녀. 아주 코스가 정해 있군요.

- 그렇죠. 코스가 정해있죠.

- 그때 그 주로 많이 교유 하시던 분은 그러니까 유석하고 또.

- 그 옛날에 지금 작고 했습니다만은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유학 하다가 중퇴하고 ...주립대학을 그 저 이 PHD 맡아가지고 온 이관용 박사 또 이 고 변영로 군, 인제 그 뭐 인촌은 더 말 할것도 없고, 설산 그 장덕수 그 분, 그 뭐 또 이 저 이북에 납치당한 6·25 때 정인복 선생.

- 네. 그런분들하고...

- 우리나라 한문으로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하고 뭐 주야상종 이지요 뭐.

- 밤 늦게 까지도.

- 그렇지요. 인제 그 유석의 그 얘기 하나를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그 사람이 그 마작 같은걸 좋아 합니다. 뭐 할것도 없고 이러니까 밤낮 친구집에 다니면 마작이나 하고 그 땐 딴거 뭐 할 도리가 없으니까.

- 그렇죠.

- 그러다 밤늦게 인제 집에 와요. 내 집으로. 인촌댁도 인제 역시 그랬을겁니다. 나중에 인촌 얘기 들어보면 또 마찬가지 자다가 보면 그 긴다리를 갖다가 내 가슴위에다 올리면 숨이 막히면 벌떡 깨서 보면 유석이 이불속에 들어와서 그대로 코 골로 잡니다 그려.

- 아 어느새 모르게 찾아 오는군요?

- 그렇지요. 그 때 인제 참 유석이 그 뭐 일정한 주소가 없고 부인과 자제들은 다 하숙에 두고 이러니까 잠자리 같은건 맞게 돼요? 대개 친구집에 와서 자는게 보통이죠.

- 어쨌든 그 조 박사의 그 호탕한 성격이라 그럴까 또 그 독특한 음성이 있지 않습니까?

- 그래야 그래야 우리 같으면 벌써 수중이 마르면 이맛살이 찌푸러지고 이러는데 난 유석은 그렇게 건달로 댕겨야 한 번 돈 걱정 하는걸 보지 못했습니다. 그게 우리완 조금 다른점이라고 할까?

- 하여튼 그 분의 음성은 인제 다시 들을 수 없게 됐고, 그 말하자면 이젠 뭐 다 가지 않았습니까? 누가 남았어요?

- 그 유석의 음성은 독특 하잖아요?

- 낫거든 곧 돌아오겠다 그리고 그 떠날 때 음성.

- 그랬죠. 그 김포 비행장에서.

- 그 녹음 좀 지금 들어볼까요?

- 아 좋지요.


- 건강한 몸으로 2월 말 경에는 오리라는 그런 자신을 가지고 갑니다. 그래서 어제 이 대통령을 만나 뵌 좌석에도 그 양반이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할 때에 내 대답은 시작은 물론 건강한 그런 몸으로 돌아오기를 확신 합니다. 그러고선 공명 공정한 기회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나왔습니다.

- 5년 전 음성을 들으니까 감개가 새롭습니다.

- 가슴이 아픕니다. 근데 인제는 유석 뿐 아니라 해방을 전후해서 우리가 참 서로 가깝게 지내던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이제 마지막 유석 까지 가고 난 뭐라고 할까요. 그 사막에서 헤메서 살기싫은 생활을 하고있는 사람같은 느낌이 가끔 들고, 또 어찌 생각하면 그 역자들 간 뒤에 여생을 역시 그 분들의 뚯을 받들어서 국가와 민족에 최후 봉사라도 하는게 옳지 않은가 이런 생각도 아니 드는게 아니라 들긴 합니다만은 고장난 명은 옛날 말과 같이 손바닥 하나 가지고는 울릴 수 없다는 그것이 가끔 또 생각에 떠돌기도 합니다.

- 저 지금 마침 인촌 김성수 선생님 말씀이 나왔습니다만 내일이 바로 10주기 입니다.

- 그렇습니다.

- 내일서 부터는 그럼 인촌 선생 말씀을 좀 며칠에 걸쳐서 듣기로 할까요?

- 그러지요.

(입력일 : 2007.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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