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된지 올해가 꼭 20년. 그간 우리나라 정계를 주름 잡았던 가지가지 일들. 영원한 시간의 물결을 타고 흘러 가버린 과거사를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그 속에 숨었던 여러가지 얘기와 새 사실을 찾아보는 정계야화 시리즈 스물 여섯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조병옥 박사의 행적에 대해서 장택상 씨와 신동준 동아일보 정치부장의 이 얘기 저 얘기를 들으시겠습니다.
- 어제는 유석 조 박사의 마지막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조 박사의 지난 날 행적에 대해서 또 여러가지 얘기를 듣기로 하겠습니다. 저 유석 조 박사 하면 처음부터 인제 경찰 관계로 해서 같이 일하시고 했는데 그 때 인제 저 이 박사가 대통령이 되는건 순전히 유석 조 박사와 창랑 선생의 힘이 컸다 그 말씀 하셨는데 고 얘길 좀 들려 주실까요? 그 때 약속 하신거.
- 하루는 내가 그 수도청 앉았다니까 당시 그 하지중장과 비서로 있던 고 임명욱 박사가 전화를 걸고 사령관이 만나자고 하니 빨리 오라고 해서 갔더니
- 중앙청...
- 아니 반도 호텔이죠. 그 때 반도 호텔이 이 사령관 본부니깐요. 그래 임명욱 박사가 들어가 보라고 그러길래 왜그러냐고 그러니까 아 그 저 당신 친구도 또 하나 와 앉았으니까 들어가 보라고.
- 네.
- 갔더니 하지중장은 이렇게 곰방담뱃대를 입에 물고 앉았는데 조병옥 군이 와서 앉았더군요.
- 아 먼저 와 있었군요.
- 네. 먼저 와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들어가니까 그 하지중장이 하는 말이 공무상 정책으로 이것이 구현된 거니까 김규식 박사를 앞에 내새우고 이승만 박사는 좀 뒷줄에 세우도록 너희 둘이 그렇게 지금 안을 짜라. 그래 내가 알았다고 그 평소 내 내가 언제든지 사표를 써가지고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니까 두 말 않고 내가 사표를 내서 하지중장 앞에 떡 놨지요. 나 가겠소 이러니까 그 사람이 곰방담뱃대를 물었다가 손에 담뱃대를 이 곰방담뱃대를 들고서 바닥에다 치더군요. 치더니 조 하고 너하고 꼭 공모하고 다니는 줄을 내 잘 알고 있다고서.
- 그게 무슨 말인가요?
- 들어 보세요. 그러면서 이제 너 맘대로 해. 우린 아는 바 없어. 이러고 들어가요. 그러니 유석인 날 쳐다 보더니 인젠 일이 됐네. 뭐 됐나. 뭔가. 아 이 박사를 자꾸 인천으로 끌어내라 배 태워서 보내겠다고 김 박사를 내세우겠다니 자네 오기전에 내게 묻길래 나도 사표를 냈더니 아 그 영감쟁이가 화를 내고 들어가지 않았나? 이제 뭐 더이상 우리들에게 그런 얘긴 안할걸세. 그리고 둘이 손 잡고 나가 임명욱 박사가 어떻게 됐어 그래 이야기를 했더니 인제 김 박사는 그만 물러나야지. 그게 임명욱 박사 얘깁니다.
- 네. 그 때 한참 하지중장 하고 이 박사 하고 대립이 막심했던 때에요.
- 그 대립이란게 그렇습니다. 그 얘긴 좀 깁니다만은 그 때 공문성의 요직에 있는 특히 이 한국과장이라는 자가 그 좌익에 가까운 사람 이에요. 근데 하지는 한국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었고 또 유석이네 내 보관을 잘하고 이 박사를 전적으로 내 민다는 그걸 잘 알고 있으니깐.
- 그 때만 해도 한국 사람 실권이 이제 경찰이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 경찰아님 없죠. 그 때 국회가 있나요 뭐 정부가 있나요 뭐 경찰 뿐이지.
- 두 분 관계가 제일 깊었겠죠.
- 그렇죠. 말하자면 좌지우지 할 수 있죠. 그리고 또 미군들이 우리를 놓고선 우리 둘을 놓치고선 뭐 일 할 도리가 없는 사람이니까.
- 그렇죠.
- 우리 둘의 심경을 이 박사에 대한 심경을 잘 알거든요. 중도파는 우리가 절대 싫어 한다는거. 중도파라는 거는 협상인데 협상은 뭐 좌의정 되는거와 마찬가지다 하는.
- 김규식 박사 김구 주석 그 때 그 중도파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죠.
- 김구 씨는 조금 또 다릅니다. 허나 김 박사는 확실히 그건 중도파로 나가요.
- 그렇죠.
- 네.
- 그럼 그 때 그저 조 박사 하고 그 창랑 선생의 그러한 움직임을 이 박사 자신도 알았겠죠.
- 이 박사 자신도 아실 뿐 외라 참 한국민주당에서도 그 고하 의지를 따라서 절대적 이 박사를 추대 한다는 이런 정책인 까닭에 우린 그 추종했죠.
- 아 한민당 노선이었으니까.
- 그렇죠. 거기 노선이고 그 땐 뭐 한민당 노선 외엔 우리가 따라갈 노선이 없었고 또 그 노선만이 우리가 정부 수립에 가장 뒷받침이 된다 이런 결의를 가지고 있었으니깐요.
- 그리고 또 저 조 박사 하고의 딴 얘기 좀.
- 그리고 인제 미군정 때 얘기가 많습니다만은 그건 다 거두절미 하고 얘기 하자면 정부 수립된 뒤에 내가 외무부 장관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갔는데 그 때 그 조병옥 군이 정부에 들어오게끔 됐는데 그 어떻게 못 들어오게 된 이유는 지금 여기서 얘기 하고 싶지도 않고 합니다만 좌우간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현직으로서 개인의 집을 방문한 것은 조병옥 군 그 사택에 방문한 것이 그게 처음이고 마지막 입니다.
- 네.
- 그래서 그 그 때 참 이 박사 그 참 아령이라던지 그것이 참 퍽 크다고 우리가 말하고 있었습니다.
- 무슨 일로 해서 방문 했던가요?
- 그 때 유석이 정부에 들어오느냐 안들어오느냐 이런 문제가 걸려가지고 있었는데 유석이 무슨 까닭인지 그 뭐 까닭 조차 얘기 할건 없습니다만 유석이 뒤로 제쳤어요.
- 네.
- 그래서 인제 말하자면 이 박사가 그걸 위안하기 위해서 돈암동 유석댁을 방문 했습니다 밤에. 그래서 장시간 유석하고 담화하고 나온 일이 있지요.
- 네.
- 근데 그 뒤에 즉시 유석은 유엔 특사로 한국 승인 문제가 나옵니다.
- 네.
- 파리에서 그 때...
- 처음 국제연합
- 네. 국제연합이 개국됐고, 그 때 난 외무부 장관으로.
- 네.
- 그게 12월 그 해 인제 12월 47년 인가요?
- 48년 이죠.
- 48년 12월 12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 유일무이한 합법정부다 그걸 승인할 땐데 그 때 인제 9일 부터 12월 9일 부터 시작해서 9일, 10일, 11일 까지 3, 4일 동안을 장거리 전화를 걸고 유석하고 나하고 작전 포석을 했지요.
- 아 파리하고 서울하고 국제전화 말이죠.
- 그렇죠. 그렇죠. 인제 그 전화 편의는 전부 미군이 봐줬습니다. 그 땐 뭐 우리의 통신기관이 그렇게 지금같이 완벽하지도 못하고. 근데 인제 그 문제는 뭔고 하니 소련이 총회에 참가한 이상은 도저히 남한에 단독정부 남한의 단독정부는 좌익이 절대 반대하고 나섰으니까 남한의 단독정부는 승인 할 수 없다 그랬는데 마침 인제 그게 12일날 밤 9시 쯤 됐는데 유석 전화에 오늘 저녁 11시 까지 이 총회가 계속 된다 하는데 소련이 여기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으면 우린 도저히 승인 통과가 되기 어렵다 인제 내가 인제 유석한테 안을 제출 했지요. 그러면 소련이 나간 뒤에 그 인원수가 과반수 조금 넘도록 그 각국 대표들을 니가 어찌하던지 붙들어서 11시 넘도록 개회를 계속하면 소련 없는 동안에 우리가 말하자면 날치기 기습작전으로 날치기 통과를 할 수 있지 않냐. 유석 말이 그 되겠나? 그 유석 그 때 그 답입니다.
- 네. 전화로
- 그래. 해 봐라. 내가 인제 농담으로 명령이다 이러니까 글씨 이래 끊었단 말이야. 우리나라 시간으로 그게 1시 아침 1시 12일 날인가 13일날 입니다.
- 새벽
- 예. 새벽 1시 반에 전화를 걸어놓고 그 때 철기도 그 때 국무총리니까 내가 이제 외무부 장관 지내고 와서 그 파리 경향을 늘 이제 같이 듣고. 근데 유석이 전화를 걸고 11시 15분에 소련 대표가 자리를 떠났다 총회 석상을 떠났다 그래서 나가는 놈을 히랍 대표를 붙들고 사정 사정을 했더니 한 사람 두 사람을 히랍 대표가 붙들어 가지고 12시 35분에 대한민국 승인이 났다고 목메는 목메인 소리로 가지고 전화를 받고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다시피 했습니다. 철기는 쫓아 내려가더니 어디 준비를 미리 했던지 샴페인 두 병을 가져와서 철기 손으로 그 병을 쳐서 호프도 없는데다 병대로 모두 마시고 서로 좀 울고 불고 그 뭐 승인이라는게 참 어려울 소련 관계를 참 불가능 하다고 생각을 했던게 우리나라는 그 때나 지금이나 기적이 많은 나랍니다.
- 그 때 외교 성공의 하나를 결국 조 박사가 이룩하신거라고
- 그렇지요. 그것이 우리나라 대한민국 건국 사상의 불멸의 공직이지요.
- 또 그 후에 인제 자유당 정권하에서 또 조 박사가 상당히 그 반항하고 그랬었죠.
- 네. 그 때 국회 안에 국민주권 옹호 투쟁 위원회가 결성 됐습니다. 근데 그게 왜 언젠고 하니
- 58년 이죠.
- 네. 어느 부산 그 자치법 선거에 있어서 자유당에서 불법 선거 했다 이래서 그 여파로 인제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가 결성돼서 내가 위원장이 됐지요. 인제 그 때에 그 뭐 세상이 그 땐 떠들썩 했습니다만 이 박사에 대한 경고괴리안을 우리가 작성을 했단 말이야.
- 네.
- 그런데 그 경고괴리안에 12개 항목이 들었는데 그 12개 항목이 이 박사 10년 치적에 대한 성토지요.
- 네. 그렇지요.
- 비판이 아니라 성토에요.
- 우리가 그 때 그 못 올릴거라고 그랬었죠.
- 그렇죠. 근데 그 12개 항목을 작성을 하는데 유석하고 나하고 조재천 씨 하고 수표동 우리집 가서 밤새로 밤 9시에 시작해서 새벽 1시까지 그걸 참 작성을 했습니다. 해서 인제 이거 인제 국회에 낼라고 허나 자유당 손수가 많으니깐 뭐 도저히 낼 수가 없어요. 그 신문 기자들 말이 어쩌든지 이 놈을 의정단상에서 발언을 해야 우리가 신문에 게제를 하지. 발언 못하니 게제 못하오. 하니 이건 절망이오. 이 안은 도저히 의정에 통과 시키진 않을거요. 그래 내 말이 그건 내게 맡기오. 당신네들은 써만 주오. 그 이튿날 내가 올라가서 긴급 발언을 해가지고 긴급 발언은 재쳐놓고 경국에 대한 12개 항목을 그대로 날치기 낭독을 했다 이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게 신문에 전부 게제가 돼서 그걸로써 우린 성공을 했지요.
- 유엔 한국 승인식이로군요.
- 그렇지요. 그러니까 한국은 기적이 많이 난다 그것이 내 판단이야.
- 저 조 박사 행적에 대해선 또 많겠습니다만 내일은 저 그럼 조 박사의 그 평상시 성품이라고 그럴까요? 인간미라고 그걸까 이런 얘기를 또 들려 주십시오.
- 그러지요.
(입력일 : 200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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