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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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변야화 / 주간 종합뉴스
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창랑 장택상 편 - 제4회 정당의 시초
창랑 장택상 편
제4회 정당의 시초
1965.02.13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 해방 된지 올 해가 꼭 20년, 그간 우리나라 정계를 주름잡은 가지가지 일들. 영원한 시간속에 물결을 타고 흘러버린 과거사를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되새겨서 그 속에 숨었던 여러가지 얘기와 사실을 찾아보는 정계야화 시리즈. 오늘은 그 스물 여섯번째 시간으로 각 정당의 시초 얘깁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해방 직후 수도 경찰청장 초대 외무부장관을 지낸 장택상 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 씨 와의 대담을 엮어 보겠습니다. 》

어제는 그 좌우익 대립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그 때 부터 인제 서서히 경찰도 활동을 시작하고 그래서 상당히 인제 질서가 잡혀가긴 시작했습니다만.

- 그 학병동맹 직격 사건이 이제 1월 1946년 1월 18일날 아침 인데요. 그 사건을 처리한 후 그게 1월 22일날 인가요?

네.

- 내가 경찰에 있는 동안 3년 반 인데 3년 반 동안 아홉번을 내가 저격을 당했습니다.

네.

- 근데 그 첫 저격이 1월 22일날 밤 새벽 1시 반 이에요.

열흘 만이로군요.

- 그렇죠. 내 집에 자는데 괴한이 아마 미리 들어와서 장독대 옆에 아마 숨어 있었던가 아마 그랬어요. 그래서 그 만일 그 자가 내가 그대로 잤다면 그 아마 참 당하는건데 마침 그 날 안 자고 이래서 다행히 그 식모가 물 뜨러 가다가 그 장독대 옆에 숨어있는 자를 발견 해가지고 소릴 지른 머리에 그 앞 대문 앞에 경비하고 있던 경찰관이 좇아 들어가서 발포를 하니깐 그 장독대를 타고서 그 옆집으로 넘어서 가면서 네 번을 발포를 하고 갔어요. 그런 일이 있었고.

권총 이었나요?

- 아 권총 네. 그게 인제 내 첫... 그 우스운 얘기 하나 있는거는 내가 그 이듬핸가요? 그 때 이제 수도청이라고 이름을 개칭 했을 땐데 그 땐 그 저 이북하고 이남이 우편이 서로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랬죠. 네.

- 근데 편지가 하나 날아들어왔는데 내 그 이름도 안 잊어버려요. 왕희필 이야. 난 동경제일대 법과 출신으로 민청 간부다. 내가 너를 학병동맹 관계로 너를 꼭 내가 죽일려고 했다가 1월 22일날 밤에 내가 실패를 했다. 그 때 네 집에 들어 온 사람이 나다. 허나 너는 반드시 인민재판을 받아서 처단을 받을 터이니 각오해라. 이런 편지를 내가 받은 일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그 때 인제 그런 그 상황 속에서 서서히 인제 우익도 정당을 꾸미기 시작했지요. 그 정당이 아마 한민당이 되겠지요?

- 그렇죠. 한국 민주당 이지요. 한국 민주당 이라는 것이 별개가 아니고 국민대회가 인제 고하가 위원장으로 있었으니까 고하가 한국 민주당 위원장 국민대회 위원장 두 개 겸직해가지고 있었죠.

네.

- 낭산, 또 뭐 함상훈씨, 또 그때 설이식씨라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오래 했던, 그 분들이다 간부로 있었으니까 그 뭐 마찬가지 한 집안이죠 뭐.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 별 사람이 아니고.

국민대회 그 저 조직체는 어디 그 때 기구를 뒀었나요?

- 그건 동아일보가 동아일보가 그 때 문이 잠겼댔습니다. 동아일보가. 해방이후에 발간을 못했으니까. 처음 여기와서 모두 청소를 하고, 지금 그 사장 젤... 하지가 혹 올런지도 모른다 이래서 외교부장실은 가장 화려하게 꾸며야 하겠다는 얘기가 있었어서 그 때 새로 모두 가구를 들여오고, 또 자동차도 하나 장만했습니다. 자가용. 이거 근데 위원장은 안 타고 내가 타고 다녔..하하하. 그래서 이거 여길 내가 한 3개월 근 4개월. 내가 경기도 경찰부장 직을 맡을 동안 내가 동아일보에서 기거를 했으니까요. 밤으로 여기와 자고. 이제 그 고하가 위원장으로 하지하고 하루 두번 세번 만나게 되고 그 때 말하면 반탁문제로 가지고 하지하고 이제 그 얘기가 이럴때, 내가 꼭 통역으로 댕기고 이랬으니까. 여기서 뭐 자기를 자야 3-4개월을 내가 동아일보에 있었습니다만, 그 때 뭐 수개월 이상을 내가 여 자다 싶이 했고. 밤으로 갈려가도 집에 갈려가도. 여기서 기거를 했죠.

그 저 해방 직후에 이제 동아일보가 발간 다시 복간되가지고 그 때 이제 처음에 고하 송진우 선생이 이제 첫 사장으로 복간 초대 사장으로 계셨고, 그러다가 이제 송진우 선생이 정당으로 관계하시는 바람에 김성수 인촌선생이 다음 사장자리를 물려받으셨다가 그랬다가 이제 또 고하 송진우 선생이 암살된 뒤로 인촌선생이 그 위원장자리를 또..

- 맡으셨죠.

그 동안에 동아일보 건물하고는 불가분의 관계였었군요.

- 그렇죠. 허허.

그 때 그럼 한민당의 또 기구는 어디서 발단을 보았습니까?

- 한민당 기구가 동아일보죠 뭐.

한민당 전에 그러니까 국민당이던가요? 잠깐 정당 같은게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 네. 그 저 윤보선씨 댁에서 최초지요. 아마 내 기억에는. 그 때 내가 확실히 기억은 안 나. 내 거 이틀동안 참석했다가 고하가 처음 조직한 국민대회로 옮겨왔으니까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그 국민당이라고 그 때 이름을 짓고, 그때 그 프로그램을 내 글씨로 써서 벽에다 붙은 기억은 내가 납니다.

안국동 윤보선씨 댁.

- 그렇죠. 안국동 윤보선씨 댁에서 출발했죠. 그 때 안재홍씨도 그게 포함이 됐는데, 안재홍씨는 한번인가 출석하고 나중에 떨어져 나가서 새로 뭐 무슨 정당인가 그래 이름은 기억은 안납니다만 중도파로서 처음 조직을 했고. 그 외 이제 그 윤보선씨 댁에서 하던 소위 정치인 동지들이라는 건 전부 한국민주당으로 건너와서 그것이 이제 말하자면 한국민주당이 윤보선씨 댁에서 출발했던 그 국민당이 그 모체라고 해야 좋을까 어떨까 그건 나는 확실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좌우간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한국민주당으로 유입해 온 건 사실입니다.

그래가지고 한민당이 이제 발족해가지고, 아까 말씀 나왔던 국민대회 이것을 이제 뜻을 못 이루고 그래가지고 우익들이 처음 대중집회 연게 언제가 됩니까?

- 우익들이 이제 대회... 우리가 이제 경쟁을 했습니다. 그 때 전평이라고 좌익단체 남로단 전평이 있지 않았어요? 전국평의회 라는 것. 그 좌익단체. 그것하고 대립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이 대한노총이라는 걸 그 때 시작했죠. 그거하고 서로 이제 대립을 시켜 가지고 서울운동장 또는 남산 일대 그 거리로 집회가 자주 자주 열려서 서로 싸움도 많이 나고 살상도 많이 나고 그 뭐 얘기가 상당히 복잡하고 깁니다.

그 저 제가 기억하기엔 젤 첫 번에 중앙청에선가 한 번 시민대회를 열고 하지중장 환영횐가.

- 그 그게 9월 그게 12일.. 아! 9월 15일 쯤 될껀데. 이박사가 한국 나오신 지가 불과 일주일 될락 말락 할 때죠. 그 때 조병옥 군인 시민대회를 중앙청에다가 열고 하지 중장 그 때 환영회를 했어요. 했는데 아침식전에 유석이 내집을 쫒아왔더군요 7시에. 와서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 통역을 내가 맡을 터이니 군사령관 하지 중장 통역은 니가 맡아라.

그 때 조병옥 박사는 뭘하고 계셨나요.

-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지. 그래서 이제 그 날 내가 가서 하지중장 군사령관 통역을 내가 했고. 이제 고 담에 군정장관이 연설할때는 에.. 조병옥군이 했고. 그 때 이박사가 우리는 이박사를 초청을 안 했어요. 시민대회니까. 이박사 초청을 안 했는데. 하지중장이 유석을 보고 그러더군요. 아. 이박사가 나오지 않았느냐. 나왔소. 그 그 분 이자리에 참석하도록해라. 그래서 이박사 그 때 조선호텔 와 계셨어요. 그래 이박사를 그 날 나오시라고 했는데. 초청을 해서 처음 그 어른 연설을 들었습니다. 내가. 영어연설을. 영어연설을 듣는 데 한가지 재밌는 얘기 할까요? 그 때 백선규씨라고 그 저 이 고려대학교수로도 오래있고 우리나라 영문학자로는 참 우수한 사람입니다. 이 이가 영어에 대한 자부가 많아요. 특히 그 문법에 대해서 자부가 굉장했는데. 그 날 그 회의석 환영석상 백선규군이 뒤에 앉았댔어요. 언제든지 이박사 영어 발음이 시원치 않다고 이런 농담 비슷하게 우리하고 해왔는데. 그 날 이박사가 영어 연설을 이제 하더군요. 하지중장이 소개를 해요. 이박사를. 참 이 양반이 이상 잘 해요. 처음 시작할 때는 뭐 음성도 그렇게 크지 않고 한데 나중에 뽑는 솜씨가 대가더군요. 백선규군이 내가 이제 난 하지중장옆에 섰지 않겠습니까? 통역을 할려고. 뒤에 와서 내 옆구리를 이렇게 찔러요. 왜 그러냐고 하니까. "그 미국상원의원 그 선거연설이야. 이상 영감쟁이 잘하는데?" 그 내 웃으면서 당신도 칭찬할때가 있군 이러니까 "아. 잘해. 썩 잘해." 그런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 그 때도 그 저 미국이 말이죠. 처음 해방 직후서 부터 그 이승만 박사를 우리나라 영도자로다가 그렇게 속셈으로는 내정했던게 분명했던 모양이에요.

- 천만에요!

아닐까요?

- 나중에 국무성 직영으로서 철처히 이박사를 도로 인천으로 쫒을라고 그 얘기가 이제 나옵니다. 앞으로. 시간만 여유가 있다면 내 하죠. 이박사를 참 대통령으로 만든데 그 유석하고 나 아니면 안됐습니다. 김규식씨가 나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하지중장이 또 그런 공작을 뒤에서 하는 걸 보믄..

- 하지. 그 때는 하지중장이 백지지요. 이박사가 처음 들어왔으니까. 나중에 이제 그 입법위원이 되고 이런 후에 김규식씨가 등장하잖았어요. 그 어른이 늘 참 중도파라고 하고 또 미군정에서도 그렇게 알고 우리도 늘 이 양반이 중간으로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참 이박사하고 이박사는 극우 아닙니까? 그 뭐 공산당하고 불공대천지... 우린 이 유석이나 나는 죽으나 사나 이박사를 떠밀고. 김규식씨는 우리 둘이 미우니까 갖은 모략중상을 다해서 조병옥이 경무부장 목 띠고 장택상이 수도청장 목띠는게 그 양반 일이였댔지.

그럼 유석 조병옥박사 그 말씀을 요다음에는 월요일날 해주시죠.

- 하죠.

(입력일 : 2007.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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