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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창랑 장택상 편 - 제2회 해방직후의 무정부 상태와 치안경찰의 출발
창랑 장택상 편
제2회 해방직후의 무정부 상태와 치안경찰의 출발
1965.02.11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해방 된지 올해가 꼭 20년, 그간 우리나라 정계를 주름잡은 가지가지 일들. 영원한 시간의 물결을 타고 흘러버린 과거사를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되새겨 그 속에 숨었던 여러 얘기와 새 사실을 찾아보는 정계야화 시리즈.
오늘은 그 스물 네번째 시간으로 경찰 만능시계에 대한 얘깁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해방직후 수도 경찰청장 초대 외무부 장관을 지낸 장택상 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 씨와의 대담으로 엮어 보겠습니다.

- 네. 어젠 해방 그 이듬 해 그러니까 1월 13일날 처음으로 그 경찰 시무회를 시작 하셨다는 말씀까지 들었는데 그 때는 그러니까 그 저 경기도 경찰부가 어디 있었죠?

- 그 때는 경기도 경찰부가 지금 아마 경기도청으로 쓰고있느 그 장소 입니다.

- 네.

- 경기도 지사는 그 때 어디로 갔는지 그 장소가 아니에요.

- 네.

- 지금 경기도청이 어떤 경찰부에서 전용을 하고 쓰고 있었어요.

- 우선 나가 보시니까 뭐 직원같은 사람들이 뭐 좀 있었습니까 그 때.

- 그 때 직원이라는 것이 나중까지 내가 쓰고있던 사람이 두 사람인가 밖에 없고, 그 외에는 있었던 사람이 형편없는 사람들이에요.

- 몇 명이나.

- 그 때 한 그래도 인원수로는 한 수십명 돼요. 간부가.

- 네.

- 지금 변호사로 있거나 그 뒤에 그 이가 헌병감도 지내고 이랬나? 지금 변호사 인데 그 전봉덕 씨가 그 때 있더군요. 있고. 몇 사람 아주 끝까지 내가 썼던 사람이 한 두어명 될랑말랑했죠.

- 그러면 그 때 인제 그렇게 인적 자원이 부족했는데 결국 제일 시급한게 우선 경찰 인원을 충당하는 일이 아니었겠어요.

- 그래서 그 때 보궐형 19호 라는게 있었습니다.

- 네.

- 그거는 뭐 말하자면 계급령 마찬가지지요. 경찰 부장이 그걸 가지고도 권리 행사를 할 수 있고 이랬어요. 내가 각서에 명령하고 과거에 조선 사람으로서 일경에 복무하던 사람 명부가 있나 없나 이걸 첫째 내가 알아 봤어요. 보니까 마침 남아 있었어요. 그 자들 일경들이 갈 때에 우리나라 그 요시 서울의 요시찰 인물이란 과거에 독립운동 하던 사람도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그 요시찰 명분을 굉장히 꾸며 놓으게 있었습니다. 그거는 전부 소각했고 그 외에 경찰 서류는 대게 남아 있었어요. 저 때의 지금도 그게 남아 있습니다만은 그걸 뭐라합니까.

- 지문...

- 네. 지문. 그게 지금 남아 있어요.

- 네.

- 그 지문에 보면 유색이 그 저 이 수의 입고 나도 또 그거 입고 그 뭐 봉두난발 해서 사진 박힌게 지금도 이 치안국에 있을겁니다.

- 아 조병옥 박사 말이죠.

- 예. 예. 내 한번 저 순시 나갔을 때 그 찾아 봤어요. 조병욱 군 있나. 또 내가 있나.

- 어 어디에 보관 돼있었어요?

- 지금 치안국에 보관 그냥 돼있어요.

- 아니 그 때 당시.

- 그 땐 이제 경기도 경찰부 였지요.

- 네.

- 그래서 그 유석은 그 뭡니까 그 저 일본 옷 그 소매 없는 그 저 이 일본 사람들 목간 갈 때 입는 그거 입히고 머리는 뭐 몇 달을 안 깎아서 뭐 형편없이 이래가 수염이 모두 길러지고 그 사진하고 지문이 있고, 나도 또 그 사진이 한 장 있어요. 그거 보면 지금도 그 치안국에 남아 있어요 그게. 근데 그게 남아 다행이 그게 남아 있었어요. 그게 있고 인제 그 조선 사람으로 복무하던 사람 명부, 이제 그걸 명부를 전부 경찰부로 갖다가 포구령 19령에 의해서 명령을 내렸습니다. 24시간 안에 소집에 불우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 금고 또는 구류에 처해서 엄담을 한다는 명령을 내렸더니 다행히 육십 몇 시간이 못 지내서 280여명이 호응 했어요. 각서에.

- 처음에는 전부 숨고 야단 났었죠.

- 그 자들이 원간 그 참 우리나라 사람들의 그 징후 대상이 됐댔으니까 일본 사람보단 저희들이 걸리면 더 녹는다 해서 전부 그림자를 감추고 말았어요. 그래서 그 현직 경찰이라는게 어제도 잠깐 얘기 했지만 그 엠쥐라고 그 저 완장단 그 자들은 대게 그 신분을 보면 설렁탕 배달군, 여관 보이질 하던 이 이랬는데 이게 뭐 나도 불과 그저 18~19세기 20세 좌우간 이건 뭐 될 수 있나요. 그래서 좌우간 3일 안에 직업 경찰관을 내가 소집한 것이 근 300명이 됐겠습니다.

- 안 온 사람도 있었어요?

- 안 온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간부에 그 땐 견붑니다. 지금은 경호위라고 하지만 신 모란 자가 숨고 안 왔어요. 그 자가 서대문 경찰서 지금 내 기억 납니다만 서대문 경찰서 저걸 두고 있던 잔데 이 자를 마침 붙들었다 이 말이야. 그래서 재판서 넘길 때만 8개월 징역을 받아서 아마 그걸 치뤘죠. 지금 아마 모 회사 취직하고 있지. 이러고 내가 말았고. 그 때 그 실례를 하나 들었어요.

- 네. 그래 경찰들 결국 모아가지고 맨 처음에 하신 일이 뭐였습니까.

- 그 때 인제 내가 한것은 그 자들 모아 가지고 각 서에 다니면서 이틀동안을 내가 훈시를 했습니다. 그 훈시의 요지는 격려예요.

- 예.

- 왜냐면 첫째 사기아양을 시켜야 일이 되니까 근데 어떻게 과거에 일제 때 경찰에 복무했던 그 뉘우침과 그 사죄의 의미에서 앞으로 우리가 정부수립 될 때에 국가에 이바지 하겠다는 이런 새 정신 새 마음으로 우리가 출발 해야겠다 그래서 그러면 너는 앞으로 건국 공로자가 돼 과거의 일경시대 때의 너희 죄과의 의무는 그건 뭐 씻어 버리는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앞으로 건국 공로장을 탈 이런 희망을 가지고 철저히 이 치안을 유지 해야겠다. 이래서 이 사람들을 참 격려를 해 주었더니 그 사람들 다행히도 날 절대로 믿고 또 내 명령이라면 절대 복종하는 이제 그것이 말하자면 치안 유지의 첫 걸음 이라고 볼 수 있지요.

- 그 때에 결국 저 새로 모았던 사람들하고 그러면 이제 다시 경찰관들을 뽑진 않았던가요?

- 경찰관을 뽑기 보다도 간부급은 대게 서북 사람들을 많이 등용 했습니다. 그 때에 지금 연백군 그 청단이라고 있었어요. 글로 이북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 많이 그 길을 타고 넘어 왔는데 그 때에 이북에서 경찰관으로 복무하던 사람들이 쫓겨서 이남으로 내려올 때에 그 청단을 건너서 그 이제 3·8선 이지요. 건너서 서울로 온 이사들이 전직 경찰관을 등용 한다는 얘길 듣고 경기도 경찰부로 많이들 왔어요.

- 맨 첫번엔 전부 완전무장 하고 그랬댔었죠?

- 완전무장 이죠. 근데 그 때 경찰관 무기고가 있습니다. 지금도 이 저 이 주한청 앞에 있을겁니다. 그 무기고가. 거기에 일본 사람들이 그 38식 총을 많이 남기고 갔고, 또 그 때에 인제 내가 군정 장관이 그 때 나날드 소장 이었댔습니다. 그 분에게 말해서 엠원 총을 처음 받았습니다.

- 몇 자루나.

- 그 때 내가 받기를 1600자루를 받았는데 그건 수도에다가 전부 배급해 주고 경기도 일대엔 미쳐 거긴 못가고 여기서 쓰고 있던 일본 그 38식 총을 전부 경기도 각 군에다가 배급을 해 주었지요.

- 권총 같은것도.

- 권총은 전부 일본 헌병대에서 쓰던거 그걸 전부 그 때 한 6000여 자루가 됐어요. 그걸 전부 경찰관에게 전부 배급해 줬는데 그게 나쁘다고 해서 한달인가 두달 후에 미국 그 저 이...

- 포티파이브요?

- 포티파이브 그걸 전부 바꿔왔지요.

- 네. 그래가지고 결국 저 이 경찰 결국 업무 시작해가지고 나서 제일 첫 번 사건 같은건 뭐가 일어났습니까.

- 아 그 얘기가 장황한 얘기를 간단히 줄여서 얘기 하자면 지금 말하자면 경찰관이 위신을 아주 추락시킨 까닭에 그 해방 이후에 경찰관에 대한 신빙성도 가지지 않고 또한 경찰관으로서 군중을 대하는 그런 그 위신히 전혀 없어졌어요. 그래서 이걸 어떡하면 이 위신을 아양시키나 이걸 퍽 걱정하고 있었댔는데 마침 그 1월 18일 아침 1시 반탁학생시위가 일어났을 때 광화문통 네거리에서 그 때 그 소위 삼청동에서 근거를 두고있던 그 자들이

- 좌익 학생들이요.

- 그렇지 학병동맹. 그 학병동맹이라는게 뭔고하니 일본시대 때 학병 갔던 사람들이 그 어째서 그들이 좌의정이 됐는지 아주 그 좌의정 전위부대로 한 1700여명이 삼청동에 있었습니다. 삼청동. 일제시대 때 시중회라고 해가지고 친일파들이 그 점령하고 있었던 그 건물을 점령하고 그 자들이 그 18일날 아침 1시 반에 반탁 학생들이 경교장 주택으로 몰려가는 것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습격을 해서 사상자가 여학생까지 개인 사상자가 수십명이 났고, 또 한 40여명이 부상 당하고 그냥 일본 총으로 38식 총으로 그냥 막 사격을 해댔으니까.

- 그 자해 학생들이죠.

- 그렇죠. 그걸 내가 집에 자다가 12시 반에 전화를 받고 즉시 광화문통 네거리로 달려갔죠. 갔더니 그 때 눈이 굉장히 왔댔습니다. 최근에 보지못한 눈이 왔댔는데 그 눈 위에 선혈이 약 네 평 정도 선혈이 덮었어요. 끔찍하죠. 그리고 마침 인제 그 죽은 사람이 넷인데 여학생이 둘이고 마침 그 저 삼사십명은 세브란스 병원으로 데리고 가고 마침 여학생 하나 부상자가 팔이 떨어졌어요. 그걸 싣고 있는걸 그 때 내가 목격을 했지요.

- 네. 그러니까 그게 결국 시무 첫 시작한지 닷새만이로군요.

- 닷새만도 못 되지요. 내가 13일날 이니까 가만있어 14일 15일 16일 17일 그렇지 닷새 만이죠.

- 그래가지고 결국 경찰이 민중한테 처음 위신이 되었다고 그럴까요.

- 그러니까 학병동맹을 습격하던 얘기가 앞으로 나올 겁니다. 그 때 비로소 조선 경찰이 강력하다 건재하다 이것을 국민에게 보여 주었고 또한 또 실력 행사를 하였지요.

- 네. 다음은 또 내일 듣기로 하겠습니다.

(입력일 : 200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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