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꼭 20년, 우리나라 정계를 주름잡은 가지가지 일들, 그리고 우리가 겪은 여러가지 과거사, 영원한 시간의 물결을 타고 흘러간 이 과거사들을 이 시점에서 다시한번 되새겨 보고 숨겨졌던 새로운 사실과 교훈을 찾아보는 정계야화 시리즈. 오늘 스물 세번째 시간 입니다. 오늘 부터는 해방 직후 수도 경찰청장 그리고 초대 외무부 장관등을 지낸 바 있는 장택상 씨의 정계 여러 얘기를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 씨와의 대담으로 계속 보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해방 직후의 무정부 상태와 치한 경찰의 출발에 대한 얘깁니다.
- 네. 어제 까지는 정계야화 이 시간 시리즈로 경무대 비화 얘기가 나갔었습니다. 창랑 선생님, 이 시간 방송 가끔 들으신 일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 글쎄요. 가끔 듣기도 하고 친구들한테 들었단 얘기를 전해 받은 일도 있습니다만. 그 참 이렇게 생각했어요. 왜냐면 그 제목이 재밌어요. 정계야화 라는건. 그렇잖아요. 정치는 밤에 역사는 밤에 이루어 진다 뭐 이런 얘기도 있고, 또 뭐 잘 아시겠지만 정치와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요. 또 정치학이 역사학에서 떨어진지가 얼마 안 되는 이런 사실을 등등을 볼 때, 그 야화라는 것이 퍽 재미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 뭐 해방 후 얘기가 자연히 저 창랑 선생님 말씀도 많이 나오고 그랬는데 어땠습니까. 그 실제로 겪으신 일하고 과히 어긋나진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 아니요. 그 처음부터 끝까지 잘 듣진 못했습니다만 중간에 드문드문 들은건 있습니다만 대게 그 부합된 것이 많다고 저는 듣고 있었습니다.
- 네. 오래전 부터 이런 계획을 할 때 창랑 선생님 생각도 많이 했고 그래서 오늘은 이 부득부 선생님 모시고 좀 그 해방 후 선생님이 아니면 못 보고 선생님이 아니면 못 들었던 여러가지 얘기 이런걸 좀 앞으로 당분간 들어 볼려고 합니다.
- 그것이 그 야화 라는게 재미있어요. 왜냐면 이것이 처음 시작 되기를 내 기억에는 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때 부터 시작인데. 미스터 신도 아시다시피 그 분이 그 소아마비증으로 행보가 잘 되지 않고, 그 분의 사진이 여러 해 동안 나오지 않았습니다.
- 상반신만 나오고 그랬죠. 그 때.
- 그랬죠. 국회에 출석할 때도 그분의 국회에 걸어들어가는 그 모습은 전혀 우리가 보지 못했어요.
- 네. 네.
- 그래서 그 분이 행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혹 신문기자 하고 회견 한다던지 그 외에 무슨 정치 일반 그 참 문제에 대해서 논의 할 때에 대게 그 자리에 앉아서 그 파이어 플래스 옆에 앉아서 얘기를 많이 하게끔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파이어 플레서 토킹이라고 아주 그게 한 숙어가 되다시피 해서 지금은 그게 유행 되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동아방송국에서 정계야화 라고 제목을 붙인게 내 혼자 생각하기에 아 이게 아마 여기서 온건가 보다 이래서 그 제목부터 퍽 취미있게 생각했죠.
- 네. 창랑 선생님 이렇게 오래간만에 뵙고 보니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정 하시기가 매일반 입니다. 근데 여전히 머리는 이렇게 검으신데 뭐 염색 하신거 같기도 합니다만 어떻습니까.
- 염색이요? 나는 뭐든지 가공은 싫어하는 사람 입니다. 더구나 염색은 꿈에도 생각조차 못 해본 것이고.
- 아니 근데 지금 제가 알기에는 70이 넘으셨던가 그런데 올해 저 춘추가 어떻게 되세요.
- 글끼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미스터 신에게 좀 얘기하고 볼까요? 불문장자지년이라는데 나이 많은 사람 나이 묻는건 좀 곤란한데요. 하하하.
- 근데.
- 난 나 몸은 좀 늙었지만 마음은 아직 젊은 까닭에 극히 연령을 내세워가지고 뭐 퇴진할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 아니 근데 보기에는 한 예순 한 둘이라 그래도 아무래도 곧이 들을겁니다. 이거.
- 글씨. 그렇게 됐다면 퍽 다행스럽습니다만 본 나이도 그렇게 안되서 걱정입니다.
- 아니 근데 칠십이 어떻게 넘으신지가 몇 년이나 되셨어요?
- 살끕넘었지요.
- 살끕. 네. 해당되던 때에 창랑선생님 몇이시던가요?
- 해방되던해가 그게 그 음력 년수로 따지면 을유년입니다. 내가 그 때 쉰셋인가? 그 쯤 됬댔지요.
- 그 때 이제 경찰을 처음으로 맡게 되셨는데 그 때 뭘하고 계셨다가 그렇게..
- 그 때는 국민대회 준비위원회 외교부장으로 있었습니다.
- 아 그게 그러니까 저 정당관계가...
- 정당관계는 없고. 어... 처음에 정당관계가 있었지요. 한국민주당 전신의 국민당이라고 있었습니다. 국민당이라고 윤보선씨 댁에서 처음 출발한. 그 때 하다가 고하가 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기에 거기에 합류해서 내가 그 때 외교부장으로 있고
- 아 그 때 그러니까 한창 좌우익 막 대립하기 시작하고.
- 형편없을 땝니다.
- 그야말로 무정부상태다 싶이 한 때죠?
- 그렇죠. 일군들이 채 그 때 퇴각하던 전이고...
- 미군이 진주해가지고 한 한달 두달 고 때죠.
- 그렇죠. 미군이 9월 초순에 진주했으니까.
- 처음엔 미군이 치한을 유지하지 않았습니까?
- 처음에는 뭐 미군이 치한유지가 채 없었죠. 그 때 각 사회단체에서 소위 그 치안유지회라고 결성해가지고.
- 자치대.
- 네. 자치대. 그런 종류의. 그러니까 뭐 무정부 상태죠. 무치안 상태고.
- 그러다가 결국은 경찰의 필요성을 아마 미군정에서도 인정하게 되가지고 그 때 그
- 그렇죠. 미군이 진주하면서 즉시 인제 에 한국경찰을 그 때 그 소위 경찰이라는건 일본사람들이 대개 주장하고 있었고. 또 한국사람 경찰관도 있었지만 그 때 가 도피하다 싶이 해서.
- 거의 얼마 없었죠.
- 없었죠. 그 때 이제 소위 경찰관이라고 해가지고 여기다 암벨트를 두르고 완장을 두르고 M.G. Military governmentt 라고 붙이고 이렇게 붙이고 이렇게 댕기고 했는데 뭐 경찰관 구실을 잘못했죠.
- 근데 어떻게 해서 이제 창랑선생이 맡으시게 됐어요?
- 인제 그건 이제 하.. 그렇죠 이제 그 문제가 나오면 인촌얘기가 나옵니다만은. 내가 국민대회 준비위원회 외교부장으로 있을때에 경기도청 그 한국 사람으로 구성된 법무위원회서 치안담당할 사람을 우리가 투표를 하자 그래서 그 때 내가 당선이 됐더랍니다. 그 때는 그러니까 서울이라는게 특별시가 아니고 경기도에 포함되있었을 때죠?
- 그렇죠. 경기도에 포함...그래서 이제 국민대회로 대표자가 왔어요. 그 때 김성수씨도 개입됐습니다. 와서 날 경기도 경찰부장직을 맡아 달라고. 그 때 고하가 일축을 했어요. 그 땐 정부가 곧 구성될 텐데 미군정이 삼년까지 갈 줄은 모르고 정부가 곧 될텐데 경찰부장을 맡다니 그건 말이 안되는 얘기다. 그래서 그만 그것이 좌절이 됐죠. 그랬다가 이제 그 해 연말에 고하가 작고하시지 않았어요? 암살당하고... 이듬해 한국민주당 위원장직을 인촌이 물망 올라서 인촌에게 권유를 해야 인촌이 좀처럼 듣질 않아요.
- 송진우 선생 후임으로 말이죠.
- 그렇죠. 그래 이제 여러 동지들이 나를 앞장 내세워 가지고 인촌을 좀 졸라보라고 해서 7-8일차 인촌한테 가서 졸라봐야 좀처럼 듣질 않아요. 그래 끝에가서 서로 참 ..까지 날 정도로 이렇게 했는데. 인촌이 그래도 그러면 내가 양보를 한테니 니가 경기도 경찰부장직을 맡아라. 그럼 내가 수락하겠다. 좋다. 그래서 그 둘이 함께 한 날 참 출발하다 싶이 인촌은 한국민주당 위원장직을 맡고, 나는 경기도 경찰부장직을 맡게 됐습니다. 그게 그 이듬해 1946년 1월 13일이 내가 등차가 된 날짜에요.
- 그러니까 그게 서울치안 말하자면 맡으신 첫째 일보죠?
- 그렇죠. 서울하고 경기도 일대죠.
- 그 때 그러니까 우익하면 이제 한민당인가요? 국민당시절...
- 한국민주당이죠.
- 한민당. 한민당 저 아까 말씀한 고하 송진우 선생이 암살당하고 한창 어지러울때 아닙니까?
- 그렇죠.
- 그전에만 하더라도 사건이 몇몇있었죠? 선생님 저 경찰 맡으시기 전에만 하더래도. 또 뭐 좌익같은 습격 테러 같은게 그 때 한창...
- 그 때는 강도 절도가 심했지 정치적 무슨 충돌은 별로 없었습니다.
- 아 그 때는 아직 시작아니죠.
- 이제 고하 암살이 처음 시작이죠. 요인암살이 처음 시작하기를 1945년 12월 30일 고하암살로서 출발이 됐습니다.
- 그러면서 이제 경찰의 요청이 참 경찰의 필요성이라고 그럴까요 이런게 더 시급해 졌고
- 한국사람이 경찰을 맡음으로서 비로서 이제 그게 정비가 됐죠.
- 그 때 그러니까 아까 말씀한 미군정 고문이라는 사람들은
- 30명
- 어떤 분들이었는가요.
- 김동성씨가 그 때 위원장이고. 그 외에 이제 서울시에 거주한 실업가 정치인 교육자 뭐 전부 합해서 33명이가 됐어요. 가장 유수한 분들이 그 때 경기도 지사는 물론 군인으로 미국사람이 가지고. 미국 사람들이 한국 사정을 아나요. 그래 한국 고문단을 조직해가지고. 33명인가 내 기억에 그렇습니다. 근데 그 땐 유수한 인사들은 다 그 고문단에 포함돼서. 이 그 분들이 치안이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 일단 정리해야겠으니 경찰부장직이 가장 중요한 직을 빨리 차리자. 이래가지고 그 때 뭐 아마 내가 당선됐던 겁니다. 그래서.
- 그 때만 하더라도 미군정이 한국이 자치능력이 있고 또 치안확보를 하지 않으면 독립같은거 어림도 없다. 뭐 이런 걸.
- 그렇죠. 그 사람들이 본래 우리들에게 암시를 주기를 치안이 유지 안되고 로 앤드 오더가 서지 않고는 정권이양을 애저녁에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그것이 그 사람이 내세운 아주 목표입니다.
- 하여튼 그 때 저 혼란이랄까요. 이런게 맨 첨의 감격. 해방직후의 감격에서 불안으로 아마 옮겨지는 그런때였던 것 같애요.
- 그렇죠. 사상충돌도 있고 또 이제 ....도 있고. 좌우간 그 일정의 그 가혹한 그 참 법률 밑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이게 일단 해방되니깐 이거 엉망진창이죠. 주먹구구님이 대장이고 말이야. 또 거기다가 좌익사상들 가진 사람들이 와가지고 혼란을 일으켜서 자기들이 어부지리를 취해야 겠다는 이런 등등의 사태가 벌어지니까 뭐 엉망이죠.
- 경찰을 맡게되신 후의 얘기는 내일 또 듣기로 하겠습니다.
- 허허. 그러실까요.
(입력일 : 200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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