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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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경무대 비화 - 제8회 마포장
경무대 비화
제8회 마포장
1965.01.23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지난날 권부의 정상이었던 경무대를 둘러싸고 수많은 정치인들의 명멸과 그 주변에 오고 간 숨은 얘기를 들려주는 경무대비화, 오늘은 그 여덟번째 시간으로 마포장 편을 보내드립니다. 오늘도 역시 대담에는 당시 경무대 초대 비서관이었던 박용만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씨 입니다.》

- 오늘은 이 박사 해방직후의 정치활동 무대였다고 볼 수 있는 이화장이라던가 마포장, 돈암장 이런 그 몇 군데 전전했던 얘기 그런걸 좀 들려주시죠.

- 그저, 이 박사께서 그러니까 바로 우리나라에 환국을 하시자 바로 그 몇일 동안은 그 조선호텔에서 있었죠. 그러다가 조선호텔에 방 값이 비싸고 돈이 없고, 이래돼서 조선호텔에서 옮기게 됐어요.

- 그 때만 해도 이 박사가 돌아오실 때 돈을 안가지시고...

- 그렇죠. 별반 뭐 참 고된 망명생활 이었으니까 별반 재산이라든지 이런거는 없었죠.

- 그럼 초기 이 박사 생활 같은건 주로 누가...

- 네. 그거는 저희 참 그 때 한민당의 중진인 인사들 주로 한민당의 주요 인사들이 이 박사의 생활비를 조달을 했다고 이렇게 알고 있어요.
그 한 예로써는 당시 한민당의 중진인 인촌선생 김성수 선생이 한달에 요새돈으로 2만원~3만원 씩을 생활비로 보태셨어요.

- 아, 그러면 이 박사가 결국 조선호텔에서 나오셔가지고 맨 첫번에 간 곳이

- 그렇죠. 저희 돈암동에 있는 그 돈암장.

- 아, 요전서부터 쭉 얘기 나왔던.

- 네. 그렇죠.

- 돈암장은 어떻게 되서 가게 되셨습니까.

- 돈암장의 주인이 장진영씨라고 조선타이어 주식회사 사장이 그 집을 집주인인데, 이 사람이 눈치가 상당히 빠른 사람이에요.
지금껏 돈암장이 내시가 수거했던 집이 됐습니다.

- 내시라면...

- 저희 궁전에서 거세한 내시 있잖아요? 그것을 갖다가 해방되는 불과 몇달 앞서서 말이지 그 때 돈으로 80만원인가로 돈암장을 샀데요.
그와 같이 민안의 사업가에요.

- 지금은 그 분이 뭐하고 계시나요.

- 지금은 인제 이북에 납치 돼가지고 도중에 피살됐죠.

- 그러면 돈암장에 장씨가 살고 있었던가요?

- 그렇죠. 그 때에 돈암장에 장씨가 그러니까 이 박사 한테는 사랑채와 안방 건물 두 채를 빌려주고, 자기도 방 하나와 한 채를 빌려가지고 자기도 살고 있었죠.

- 그런데 어떻게 해서 또 돈암장을 물러나게 됐습니까.

- 네. 그러니까 그 처음에는 우리나라에 정부도 말이지 곧 수립될거다 또 이 박사는 참 그때 위대한 지도자니까 이렇게 집이라도 빌려줬다가 후일에 말이지 그만한 그래도 신세는 잊지 않을거 아니냐 하는 생각에서 사실은 빌려줬던 모양이에요.

- 일종의 장사속 투기라고...

- 그랬다가 정부수립 보다는 자꾸 세상이 정치 기상도가 혼란만 해지고 장기화 하고 이러니까 장진영씨가 그 자기집을 비워줬으면 하는것을 갖다가 노골적으로 의사 표시를 해가지고 나왔어요.

- 아, 더 못빌려 주겠다.

- 그렇지. 더 빌려주고 있어봤자 실속 없다 이 얘기지.

- 그래서 어디로...

- 그래가지고 인제 그와같이 딱한 사정에 놓이게 되자 그 때 당시 미군정에서 말이죠 하지중장 주선하에 마포에 강 언덕에 올라가면 마포장이라고, 그 때 이제 그 마포장은 일제시대 때 조선총독부 다나까 정부총감이 살고 있던 별장이 됐어요. 그 마포장으로 이사를 했죠.

- 그게 지금 그러니까 어디쯤이죠?

- 그러니까 지금 청수장 호텔인가요? 그 별관 그 마포에 있는 고 근처에요.

- 아, 그러니까 한강강변이죠.

- 한강 뚝 위엔데, 그 뭐 나도 여러번 갔었지만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고 또 하난 먼지가 말이지 굉장히 많아요. 또 수돗물도 잘 나오지 않고, 또 하나 집이 아주 허술하고 그래가지고 집이 좁더군요. 이래서 내가 들렀을적에도 이 박사께서는 이런집에 나를 갖다가 데려다 놨다고 이러면서 아주 불평을 여러번 하시는걸 제가 직접 들었어요.

- 정치 활동 하기엔 아무래도 교통이라던지 뭐 불편했을거죠.

- 그렇죠.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은데 말이지 그 뭐 그 정도 집 가지고는 애로가 많았을거에요.

- 그래서.

- 그렇게 되자 이 박사 께서도 그 집은 못쓸 집이라고 자꾸 불평을 하시고, 또 하나는 마포장으로 이사하셔가지고는 짐도 풀지도 않았습니다.

- 아, 풀지 않았어요.

- 네. 말하자면 하도 불만족해서 말이지. 이럴적에 이제 그 비서관이었던 윤청씨, 지금 서울시장 윤청씨가 주선을 해가지고 이.. 참 한국인의 실업가들, 그 때 이제 그 윤청씨가 주선을 해서 백승호씨라고 있잖아요 지금 동국대학 총장 내무부장관 하던 백승호씨의 매부되는 권영일씨라고 있었습니다.
이 분이 이제 주동이 되고, 또 우리나라의 박흥식씨 이런분이 주동이 돼가지고 우리나라의 우수한 실업인 30여명이 다만 얼마씩 돈을 거출해가지고 이런 참 지도자에게 집한채라도 마련해 드려야 한다 이래해가지고 구입한 집이 바로 이화장이에요.

- 그 때까진 누구 소유였던가요?

- 그러니까 그 때까지 그 이화장은 강익하씨의 소실이 살고 있었던 집이라고 그래요.

- 강익하씨는 누구죠?

- 우리나라 그 때의 그 분 역시 사업을 하고 있던 그런 분이었죠.

- 지금도 돈암장은 이 박사 개인 소유물이 돼서...

- 그 이화장, 돈암장이 아니라 이화장.

- 이화장. 그래서 저 누굽니까 양자 명의로 그렇게 바뀌었다는 그런 얘기도 있던데.

- 그러니까 그 때 참 이화장을 실업인들이 사가지고 이 박사 명의로서 그 때 등기를 낼 적에 들은 얘긴데. 이 박사 께서는 내 이름으로 등기를 내지 말라고 여러번 말씀을 했데요.
그걸 당시 비서진들이 우겨가지고 이 박사 명의로 이화장을 이 박사의 집으로 만들었다는 얘기에요.

- 지금 이인수씬가요. 그 양자 아들. 그 분이 결국 저...

- 나중에 이 박사께서 작고 하시면은...

- 상속받게 되어 있군요. 아직은 그대로죠.

- 네.

- 그럼 그 때 말하자면 정치무대였던 이화장 얘기는 또 추후에 말씀 듣기로 하고, 그 때 김구 주석께서는 경교장.

- 그렇죠. 지금 충정로 올라가는 경교장. 경교장은 우리나라 광업가 일제시대 때 광업을 크게하던 최창학씨의 집이 됐죠.

- 신문로 넘어가다가, 지금 아마 월남 대사관이 되있을 겁니다.

- 아, 예.

- 그런데 그 경교장에는 김구 주석, 이화장에는 이 박사 이렇게 해가지고 말하자면 경교장파다 이화장파다 그렇게 나눠지기도 했는데.
그 때요 정치 무대였던 그 이화장, 그 이화장하면 상당히 한식집으로 크고 지금 가보면 잘 수리가 돼있는데 처음에도 괜찮았나요. 어땠었나요.

- 네. 처음부터 그 집은 그니까 좋은집이 됐죠.

- 그러니까 이화장이 한 건평이 50평쯤 넘죠?

- 이화장 건평 50평 넘죠.

- 네. 한 100평 가까이 되지 않나 모르겠어요.

- 그렇죠 근 100평 가까운 집이죠.

- 그 요전엔가 프란체스카 여사가 그 이화장에 두고온 이 박사 친필로된 족자 뭐 이런걸 갖다 줬으면 하는 그런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명하기도 했고 그랬는데.
어때요 그 저 이런 이화장 건물이라던가 이런거에 대해서 이 박사가 상당히 신경질 적이고 아까 그 마포장에 대해서는 불평을 말하고 그랬는데, 이화장에서는 그 후도 쭉 불평 같은건 없었겠군요.

- 그렇죠. 이화장은 우리나라 역사상으로 본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바로 참 이 초대 조각본부가 바로 이화장 아니에요?
그러고 참 12년 동안 대통령으로 이 박사가 계시다가 12년동안 비워놨던 이화장으로 4·19 학생 의거 후에 다시 찾아간 곳이 또 이화장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화장은 그야말로 이 박사의...

- 꿈이 어렸다가 다시 또...

- 그렇죠. 꿈 뿐만 아니라 영고성세, 참 이 박사의 부귀영화 이것을 지켜본 그야말로 역사적 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 그 이 박사가 이화장을 또 망명 하던날, 또 홀홀히 떠나서 김포로 나가던거, 아마 이 박사가 처음 우리나라에 환국 했을 때 그 경로를 거꾸로 그대로 밟아 나갔는데 참 여러가지로 아이러니컬 한 얘깁니다.

- 그래요. 그러한 그거를 돌이켜 보면 참 인생무상이라할까 하는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 그런 감회가 깊습니다.

- 그럼 그 이화장에 얽혔던 뭐 재미있는 이야기 같은게 없어요?

- 이화장의 그 뭐 참 초대 조각 본부고 했기 때문에 이화장에 얽힌 얘기는 여러가지가 있지만은 특히 이제 그 간단하게 하나 재밌는 얘기를 하면 말이죠.
그 김장흥씨 있잖아요.

- 네. 치안국장하다가 도지사 한분.

- 그렇죠. 이 분이 인제 제일 처음에 이화장에 오기전에 돈암장에 왔었죠. 돈암장에 올 적에 김장흥씨는 뭘로 왔었느냐 하면 경위가 됐는데 중부 경찰서에 외근을 맡아보던 경이 됐어요.
그래서 경비로 와가지고 그것이 인연이 돼가지고 말이지 이 박사의 집을 지킨다 혹은 이 박사의 주위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렇게 인제 한 연고로 해가지고 결국 김장흥씨는 참 나중에는 치안국장도 되고 경기도지사도 되고 하는 그와같은 참 재미나는 얘기가 있습니다.

- 그럼 내일은 그 김장흥 그러니까 그 때 경위?

- 그 때 경위죠.

- 김장흥 경위와 이화장 얘기 같은 걸 좀 해주시죠.

- 재미있을 거에요.

제7회 이박사와 하지중장 제9회 이화장과 김장흥 경위


(입력일 : 2007.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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