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날 권부의 정상이었던 경무대를 둘러싸고 수 많은 정치인들의 명멸과 그 주변에 오간 숨은 얘기를 들려주는 경무대비화. 오늘은 일곱번째 시간으로 이 박사와 하지중장 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오늘도 역시 대담에는 당시 경무대 초대 비서관이었던 박용만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주씨 입니다. 》
- 네. 이제까진 이 박사와 우리 정계 지도자와의 여러가지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좀 각도를 달리해서 해방직후 초대 군정장관이었던 하지중장과 이 박사와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주실까요?
네. 아시다시피 그 이 박사는 하지중장 다시 말씀드리면 미군 당국에서 제일 처음에 이 박사를 주선해서 우리나라에 환국토록 했죠. 이래가지고 이 박사가 돌아오신 후에 장충광장에서 하지중장이 직접 이 박사를 국민앞에 나서서 직접 소개를 했어요.
- 뭐라고 뭐...
그 때 하지중장이 직접 소개하기를 한국의 위대한 지도자다 이렇게 국민 앞에다가 이 박사를 소개를 했죠.
- 그 때 부터 말이죠 미국이 처음서부터 우리나라 지도자로 이 박사를 추대할 속셈이 있었던거 같아요 처음서부터.
글쎄 처음에 그러니까 미군 당국에서 이 박사를 모셔온거는 그 때 당시에 말하자면 남한을 휩쓸고 있던 좌익 세력을 어느 정도 견제를 하고, 또 민족 진영 세력을 갖다가 강화하고 거기에 말하자면 지도자로서 이 박사를 모셔 온 걸로 이렇게 생각을 하죠.
- 아닌게 아니라 미국측으로 보더라도 말이죠, 그 중국에 오래 있었던 임정요인 같은분들, 그 이런 분들이라던지 또 딴데서 오신 분들 보다는 역시 미국에서 오랫동안 지낸 이 박사, 이쪽이 아마 훨씬 신원 같은 것도 잘 알고 믿을 수 있었다 이런.
뭐 그렇죠. 그건 뭐 지금이나 옛날이나 미국에서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분이고 미국 시민 생활이 몸에 젖었던 분이고 하니까 역시 이 박사에 대해서는 더 가깝게 친근감을 가졌겠죠.
- 아닌게 아니라 그 해방이후 20년 일입니다만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정계를 사실상 주름잡아 온거, 이 여러가지 고비고비마다 미묘하게 관계되는 그 배후의 미국과의 관계 이런걸 생각한다면 역시 해방 직후서부터 이 박사와 미국과의 관계도 상당히 얽혀있는 그런 요소요소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우리나라의 이제까지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것을 통틀어서 미국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고 또 미국이 배경이 되었다 하는건 이건 뭐 지금도 역시 면치 못하고 있잖아요.
- 근데 그런 결국의 미국의 의도와는 달리 결국은 일선에서 하지중장이 그걸 맡아왔는데 그 이 박사가 하지중장하고 끝판에 가선 아주 상당히 반목 상태로 결렬이 됐는데 그 때 까지 어떻게 되서 그렇게 됐는지.
그러니까 그건 인제 순전히 결국 그 하지중장은 우리나라의 임시정부를 세우는데 있어서 모스크바 미국과 소련의 합의 본 국제 노선에 따라서 우리나라의 정부를 갖다 세우고 싶었던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인제 이 박사는 `그거다 틀린 수작이다 우리나라는 국민이 자율적으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 이래 되니까 이 박사의 그 자율정부 수립 노선과 하지중장의 미·소 공동위원회를 통한 정부수립 방안과는 완전히 상치됐죠. 그러니까 하지중장하고 이 박사하고는 정치적으로 그 때 부터 대립관계를 가졌죠.
- 그 때죠. 이제 김규식 박사가 좌우합작으로 하자 해서 계속해서 하지중장쪽 하고 가까우... 이 박사는 그 때 정읍에선가 예전에 얘기 나왔죠. 단독으로라도 정부수립하자. 그 때 그런거 보면 이 박사가 말이죠. 역시 지내놓고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 정권, 어떻게든지 해서 우선 정부를 수립하자 그리고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또는 정권을 한번 장악하자. 이런 그 의욕이 상당히 불타있던 거 아니겠어요?
글쎄 그건 뭐 그렇게만 생각 할 순 없겠죠. 왜그런가 하니 그 때에 결국 이제 그 아까도 얘기했지만 하지중장이 끝끝내 미·소 공동위원회를 통한 정부를 수립하겠다는것은 그 때 당시의 미국과 소련에 국제 노선이 됐고, 이 박사는 그와같은 혼미 상태가 자꾸 국내에서 계속되고 있는데 말이지 그것만 바라보고 우리가 정부도 없이 그냥 그대로 나갈 수는 없다 하는 이런 견지에서 또 이박사가 정읍에서 제일 처음에 말씀하신것도 남한에 국한된 단독 정부를 세우겠다는게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의 힘으로써 자율정부를 수립하자 하는 얘기를 했어요. 그렇게 이 박사께서 내가 정부를 세운 다음에 대통령이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으로써 그 때 주장 했다고는 보기가 좀 그렇지 않겠어요?
- 그러나 그 뱃속이야 또 알 수 없는...
그렇죠. 알 수 없는 얘기지만은.
- 그래 가지고 아마 대통령이 그 때 국민회하고 또 민족통일총본부인가요? 요전에 얘기 나왔던 그걸 만들어 가지고 결국 그 때 미국으로 아마 떠나게 됐죠.
네. 그러니까 인제 그 참 이 박사와 김구 주석과도 이제 노선의 차이가 가져왔고 또 이제 제너럴 하지는 김규식 박사를 내세워 가지고 좌우합작운동으로 몰고 들어갔고, 그러니까 이 박사는 이 박사의 세력을 강화해야 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 우리나라 민족진영의 중진 인사들을 총망라 해가지고 민족통일총본부 라는걸 만들었어요. 그 때 인제 민족통일총본부의 스타트 멤버 면모를 볼거 같으면은 처음에 이 우리나라의 무수한 그 정치 지도자인 신익희 선생, 김성수 선생, 윤보선 선생, 허정 선생, 김준연 선생, 김도현 선생, 김산 선생, 또 그 당시의 한민당의 재정부장 이었던 김양수 선생 이런 분들을 총망라 해가지고 그 때 민족통일총본부 라는걸 만들었죠.
- 그래 가지고 결국 미국에 아마 건너가시게 된게 그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해놓고.
그렇죠. 바탕으로 해놓고 그 다음에 이 박사는 국내 운동은 완전히 실패 된거다 이거를 세계 여론에다가 말하자면 호소해서 우리나라 정부를 세워야 되겠다 이렇게 해가지고 그것이 그러니까 1946년 12월 2일날 이 박사가 단신 도미를 했어요.
- 그 때 완전히 혼자 가셨나요? 수행은 일체 없이.
수행은 없이 단신 참 미국 본 바탕에 들어 가셨죠.
- 그 때만 하더라도 결국 돈 같은게 부족하고 여비 같은거 부족하고 그래서 아마 혼자 가시게 됐겠죠.
그렇죠. 그 이 박사 혼자 가시는데도 돈이 없어서 말이지 여비가 없어서 그 때 당시에 참 국민회다 민족통일총본부다 이런데에서 참 우리들이 자금을 거출을 했어요 여비를.
- 얼마나 그 때 뭐 몇 불이나.
불과 뭐 수천불 아마 가져갔을 거예요.
- 그 때 뭐 요즘 보간지 같은거 떠들어 보면 말이죠. 미국에 갔던 이 박사가 하지중장에 대한 그 상당히 강경한 성명 같은거 내보내고 그랬던거 같은데.
네. 그래 인제 이 박사 께서 미국을 가셔가지고 워싱턴에서 공개적으로 이제 그 우리나라에 자유정부를 세워야 한다 하는걸 역설을 하게 되니까 여기서 이제 그 말하자면 혼자 당황하게 된게 누구냐면 하지중장이죠. 왜그런가 하면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어가지고 정부수립 방안을 연구해야 겠는데 이 박사께서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까지 가가지고 자꾸 떠들어 대니까 이래서 하지중장이 굉장히 당황했어요. 이래 가지고는 부랴부랴 하지중장도 그 미국에 이 박사 뒤를 뒤따라갔죠. 그것이 1947년 2월 14일날 하지중장이 미국을 건너 갔어요. 건너 가가지고는 하지중장은 이 박사가 자율정부를 시작 하는거는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일이다 이래가지고 이 박사를 공격을 했죠.
- 그래 그 때 이 박사가 국내에다 대고 말이죠 막 전보를 쳐서 신문에다 뭐 각 조직체에다 전보를 치고 뭐 야당...
네. 그래가지고 인제 이 박사는 참 이 우리나라에 자율정부를 세울 수 있게 됬다 이런 전문을 국민회에 보냈어요. 그래서 참 지금도 생각이 나지만은 참 좋아하고 말이지 박수를 치고 이렇게 했던 일이 있었어요.
- 그래가지고 이 박사가 돌아올 때 인제 뭐 외교성공 만세 인가요 뭐 이래가지고 좌익들은 또 그거대로 반대하고 혼란한 때였죠 그 때.
그럼요. 그래서 민족진영에서는 귀국환영을 다시 이제 대대적으로 하는 그와 같은 일이 있었죠.
그러니까 결국 이제 참 이런것도 지금 참 이렇게 돌이켜 생각하면 말이지 그 때 당시 미군정에 더군다나 최고 책임자가 하지중장 아니에요? 이 사람과 일대일로 맞서서 말이지 약소 국가의 참 일개의 참 그 땐 시민 자격밖에 더 됩니까? 이 박사가. 이런 분이 참 일대일로 맞서가지고 니가 뭐냐 하는걸로 해서 싸워 나갔다는건 지금 생각하면 뭐라 그랬으면 좋을까요.
- 그래서 결국 하지중장 그 후에 이 박사하고 어떻게 됐죠?
그러니까 그 하지중장은 우리나라의 그 정부가 수립될 적 까지도 있었죠. 그래 가지고 우리나라 정부 수립 경축식을 중앙청 광장에서 했었는데 말이예요. 그 때 제너럴 하지가 나와 가지고 이 박사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경축사를 제너럴 바로 하지가 했어요.
- 결국 항복한 셈이 되네요.
한데 뭐 완전히 백기를 든거죠.
- 결국 그러고 보면 처음 미국은 하지중장을 시켜서 이 박사를 추대 하도록 이렇게 운동을 했다가 이 박사는 그걸 거꾸로 물어가지고 하지를 말하자면 거꾸로 넉아웃 시키고 그리고 이제 자신이 스스로 또 영향력을 끼쳐서 정부를 만들었다. 아마 이런건 우리나라 이제까지 해방 후 20년 동안에 지금도 미국하고 관계가 여러가지로 논의되고 있습니다만 아마 좀 드물었던 일 아닌가요?
그렇죠. 이런거는 정말 참 우리나라 뭐 20년 해방 20년이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전 국제적인 회합에서 결정된것을 갔다가 거꾸로 뒤집어서 독자적인 노선을 확립해서 그것을 그대로 실천했다 하는거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상에도 없는 그런 일이라고 볼 수 있죠.
- 이 박사 그 배짱이라 그럴까요? 고집이라 그럴까요?
고집과 배짱 으로는 천하일품이죠. 네.
- 저, 그럼 내일은 말이죠. 해방후에 이 박사가 전전했던 돈암장 이화장 뭐 여러데 있잖습니까. 그 쪽 가옥들 얘기 그런거 섞어서 좀 말씀해 주십시오.
- 네. 그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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