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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경무대 비화 - 제6회 이박사와 김구 선생
경무대 비화
제6회 이박사와 김구 선생
1965.01.21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 정부가 수립된지 근 20년, 지난날 권계의 정상이었던 경무대. 그것을 둘러싸고 수많은 정치인의 명렬과 그 주변에 가지가지 숨은 얘기들을 돌이켜 보고 오늘은 그 여섯번째 시간으로 이 박사와 김구 주석 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

오늘도 역시 당시 경무대 초대 비서관이었던 박용만씨와 본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씨와의 대담입니다.

-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그 좌우익 충돌이 한창 심했을때 그때 그 이 박사와 김구 주석 그리고 곁들여서 김규식 박산가요? 그 때 그 삼영수 그 얘기를 좀 들려주시죠.

- 네. 그 저, 김구 주석께서 우리나라에 돌아오신 것이 1945년 11월 24일날 귀국을 하셨는데, 그 때 김구 주석 인솔하에 귀국하신 분이 열네분이 오셨죠.
그래서 김구 주석께서는 이제 지금 서대문 올라가는 최창학씨 그 광업하는 최창학씨 댁인 경교장에 김구 주석이 유하시고 나머지 분들은 지금 저희 충무로 2가에 있는 신도호텔 거기에 그 때는 한미회관이라고 그랬습니다만 거기에 나머지 분들은 거기에서 있었죠.

- 저 임정요인들이 돌아가셨을 때 미군에서 비행길.. 돌아온 직후에 결국 아무도 마중도 안나갔고 몰랐다고 그러더군요.

- 그 때 그러니까 제너럴 하지 미군정당국에서는 임시정부로써 인정치 않고 개인자격으로 귀국을 시킨다 이래가지고 말이죠. 그 당시 김구 주석을 모시고 들어온 지금 사장 장준하씨 있잖아요. 그분 얘길하면은 앰뷸런스 차에다가 모시고는 그냥 가만히 아무도 환영을 미리 들어오신다는 얘기 없이 비밀에 해가지고 이렇게 환국을 미군정당부에서 시켰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그걸 몰랐죠.

- 이 박사 경우하고 대조적이로군요. 결국 이박사 하고 김구 주석하고는 사이가 처음엔 어땠습니까.

- 참 좋았죠. 네. 이 박사 께서는 김구 주석을 꼭 부를 때 말이죠 김 주석이라고도 부른 경우가 있었지만은 그것보다도 아우님 아우님 꼭 그렇게 불렀고, 또 김구 주석 께서는 이 박사를 부르기를 꼭 형님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니까 아주 이 우의가 말이지 의형제같이 가깝게 지냈어요.

- 물론 정식 의형제는 아니었을 겁니다.

- 네. 물론이요.

- 그런 이 박사가 김구 주석하고는 초창기에는 쭉 손 잡고 일해왔었죠.

- 네.

- 그러다가 어떻게 돼서 인제...

- 근데 갈라진 그 얘기는 그러니까 제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지 않았어요? 열리고 결렬되기 전에 이 박사 께서는 지방 순시를 하면서 끝내 반탁이 됐으니까.
김구 주석 때문에 반탁이고. 근데 이 박사가 지방순회 도중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정 안될것 같으면은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야 될 것 아니냐 요새말로 말하자면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의사를 갖다가 정식으로 공표를 했어요. 그래 가지고는 이제 이 박사는 미·소 공동위원회 같은건 안된다. 물론 이제 신탁통치도 안된다. 그러면 이것도 저것도 안되니 결국 남한에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써 독립정부를 세워야 한다 이렇게해서 이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강력해게 추진해 나갔고, 또 김구 주석께서는 그것도 안된다 남한의 단독 정부를 수립 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래가지고 끝끝내 반탁을 해서 우리가 남북 통일 정부를 갖다 세워야 된다 이것을 인제 김구 주석께서는 강력하게 추진하고 나왔죠. 그러니까 거기에 있어서 말하자면 정치적인 견해 정치노선이 거기서 갈라졌어요.

- 그게 나중에 끝내 가서는 남북 협상까지도 갈라진거죠.

- 그랬죠. 거기에서 이제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 때 이제 그 일반 항간에서는 이 박사와 김구 주석과 김규식 박사 임정의 부주석이었던 김규식 박사를 청해가지고 삼영수 삼영수 이랬죠.

- 김규식 박사 노선은 어떻게 되죠?

- 그렇죠. 김규식 박사는 그 때 미·소 공동위원회 제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자 무슨 주장을 하고 나왔냐면 좌우 합작을 해서 좌우 합작 통일 정부 수립이다 이래가지고 이제 그 당시의 여운형과 같은 좌익계 사람과 좌우 합작 운동을 통해 가지고 통일 정부를 세워야 되겠다 이것을 좌우합작통일 정부수립 방향으로 김규식 박사는 밀고 나왔죠. 그래서 이제 그 세 분이 전부다가 정치 노선이 각각 다 이렇게 달라졌어요.
그리고 이제 참 정치노선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참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과의 서로 우의는 돈독했지만은 그 뭐라할까 인간적인 말이지.

- 성품같은게 대조적이었죠.

- 아주 다르더군요. 내가 그 이승만 박사를 처음 그 조선호텔에서 귀국하신 후에 불과 얼마안돼서 만났을 적에 이승만 박사는 어디까지나 서양식인 노신사, 백발이 허옇고 말하자면은 양옥 집에서 양식을 먹고 의자 생활을 하고 침대에서 주무시는 이와같은 서양식의 노신사 같은 인상을 받았고, 다만 한가지 깊이 인상 받은거는 이 박사가 어떤 흥분을 하신다든지 하게되면 안면이 실룩실룩 하는것이 굉장히 심해지지 않았어요?
그것이 이제 일본 사람들한테 고문을 당해가지고 그랬다 하는 얘기를 듣고 그 참 실룩거리는 안면 그것은 퍽 인상적이었어요.
근데 이 박사가 그와같이 서양식의 노신사 같은 인상을 준데 비해서 김구 주석을 제가 처음 만난것이 그 1945년 11월 30일 귀국하신 후 불과 일주일 후에 경교장에 그 때 유학생 동경대표로 찾아가서 처음 뵀었는데 그 때 김구 주석의 인상이라는건 참 강인한 성격이 온 전신에서 풍겨 나오고 또한 그 뿐만아니라 어찌나 그 서민적인지 말이예요. 그니까 인제 김구 주석의 첫 인상이라는건 참 우리 나라의 바지 저고리에다가 초가 삼간에 살면서 뚝배기 장, 된장 된장찌개를 자시는 말이지 참 그야말로 우리 나라의 서민의 대표격인 그러한 풍모고 성격도 그런거 같고, 또 하나는 김구 주석을 뵈었을 적에 사람을 위압하는 그 위압감을 느껴요 사람이.
그러니까 김구 주석 밑에는 윤봉길 의사 라든지 말이지 안중근 의사 라든지 이와같이 참 생명을 내놓고 나라를 위해서 그렇고 김구 주석을 위해서 죽는 말이지 그와 같은 그 열사들이 많이 있었다 하는 것도 역시 그와같이 그 사람을 위압하는 말이지 또 진심으로 부터 사람을 대하는 이 존대감 이런것이 김구 주석한테는 아주 강력하게 풍겨나오더군요.

- 그 결국 김구 주석이나 이 박사한테 찾아가는 사람들도 아마 성격이 차이가 날 겁니다.

- 그렇죠. 그건 자연히 두 어른이 성격이 그렇고 이러니까 이 박사 측에 돈암장, 돈암장에 찾아가는 사람을 볼거 같으면은 대체적으로 참 이렇게 양복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대체적으로 봤을적에 이름깨나 있고 내가 내노라 하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고 솔직하게 그러고 이제 경교장 측에는 물론이제 내가 내노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은 그야 말로 노동자라든지 혹은 농민이라든지 일반 참 서민 누구를 막론하고 그 경교장에는 참 자유스럽게 드나드는 그런 모습들은 그 때 당시에 벌써 아마 확연히 나타났었죠.

- 그저, 김구 선생이 그 때 김성수씨 라든지 윤보선씨 라든지 이런 분들하고 그 교류하고 계실 때 얘기를 좀 들려주실래요.

- 김구 선생께서 들어오시기 전에 말이죠 한민당이 발당하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갖다가 지지한다고 그 때 정치 노선을 밝혔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한민당으로서는 김구 주석과도 그 밀접하게 관련성을 가졌었죠. 지지를 했었으니까.
그래서 한민당과 처음에는 한민당과 김구 주석과도 또 이승만 박사 이렇게 참 삼위일체가 돼가지고 이 독립쟁취운동을 갖다 정리해 놓았어요. 네.
그렇게 해 나오다가 아까 말씀이 있었지만은 김구 주석의 철두철미한 반탁운동에 의한 자율정부 통일정부 수립과 또 인제 한민당에서 얘기하는 그 5호 서명을 하고 들어가가지고 미·소 공동위원회 협의대상이 되가지고 정부를 수립하자는 그 노선과 갈라지게 되니까 그 때 이제 김구 주석과도 한민당과는 갈라지게 되었죠.
금이 갔죠. 이래서 이제 그 말하자면 그 전까지는 그러니까 김구 주석과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해서 한민당 세력 전체가 같이 하나의 커다란 민족 진영을 형성했던것이 미·소 공동위원회 제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면서부터 이제 한민당 한민당대로 떨어지고 이 박사는 이 박사대로 떨어지고 김구 주석은 김구 주석대로 떨어지는 이와같은 정치 현실을 빚어 냈었죠.

- 그래요. 그 때 그 세 갈래로 나눠진것이 말이죠 지금 길게 내다보면 그 후에 이루어진 자유당 세력과 또 민주당 세력 그리고 한독당계의 세력 이렇게도 퍼져 나가서 세력이 달라졌다 이렇게까지 볼 수 있지 않겠어요?

- 그렇죠. 그 때에 갈라졌던것이 이제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박사를 끝끝내 적극 참 지지하던 세력들은 자유당이다 이래가지고 참 당이 따로 하나 되어버렸고, 참 이렇게 오늘날 민주당 세력은 그 당시의 한민당 중심으로 하고 또 이제 새로운 신익희 선생이라던지 많이 영입해서 민주당으로써 발전을 했고, 또 이제 참 지금와서 보면 참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그 임시정부 세력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약해 졌어요.

- 그 때 당시 활발히 움직이시던 분들이 인촌 김성수 선생을 비롯해서 윤보선씨 해공 신익희씨 허정씨 낭산 김준연씨 다 이런분들이 그 때 활발히 움직이셨죠.

- 그렇죠. 네.

-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다음에는 저 이 박사와 그 때 당시의 미군정 그러니까 하지 중장.. 시대.

- 하지 중장하고 싸운얘기.

- 그 때 얘기를 좀 들려주시죠.

-네.

*5회는 방송당시 회차가 누락되었습니다.

제4회 이박사와 한민당 제7회 이박사와 하지중장


(입력일 : 200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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