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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경무대 비화 - 제4회 이박사와 한민당
경무대 비화
제4회 이박사와 한민당
1965.01.20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경무대비화’는 당시 경무대 초대 정치 비서관이었던 박용만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씨와의 대담입니다. 》

오늘은 그럼, 이박사가 우리나라에 돌아오신 뒤에 가장 처음에 손을 잡았던 한민당과의 관계에 대해서 좀 얘기를 듣기로 하죠.
- 네. 그.. 실제 이박사께서 그 환국한 이후 한민당의 뒤받침, 당시 한민당의 뒤받침이라는거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컸었어요. 하나의 거대한 정치 세력으로서 이박사 중심으로서 끝까지 참 지지하고 또 그 주위에 직결해가지고 힘이 되었던것은 그당시 한민당 이었습니다.

네 주로 그 이박사는 처음 돌아오자마자 한민당에 의해서 결국 추대 된거죠.
- 그렇죠. 네. 그 제일 그 말하자면 측근 세력으로써 거대한 저력으로써 바로 그 발을 붙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그 한민당이라는 하나의 조직체가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정치 활동이 용이 했다고 이렇게 보죠.

그렇게 처음에 한민당의 브레인들이 누구누구 였죠?
- 아, 그 때 한민당의 브레인은 참 우리나라에 최고 지도권이셨고 송진호 선생이라던지 또 인촌 김성수 선배, 또 머리 좋다는 설산 장덕수 씨, 또 지금 생존해 계시는 김준형 선생, 백남훈 씨 등등의 뭐 참 그야말로 쟁쟁한 인사들이었죠.

그러면 이박사의 정치활동 같은것도 결국 한민당의 자금 같은것에 의해서 뒷받침을 받았던 거죠.
- 그렇죠. 제가 알기에는 이박사께서 귀국하실 적에 뭐 큰 정치 자금을 가져왔다던지 그렇게는 보지 않고, 역시 그 이박사가 귀국하신 후의 그 생활 생활비가 필요하지 않겠어요? 생활비라던지 또 정치활동에 필요한 자금 같은 거는 제가 알기로는 한민당계의 인사들이 주선해서 이박사께 드렸어요. 그리고 한민당의 당원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의 수도청장으로 있던 장택상씨 이런분들도 이박사의 재정적인 뒤받침을 많이 해줬고 또 정치적으로도 크게 뒤받침을 했죠.

장택상 씨 그러니까 사유재산의 일부를 내놓았던 건가요?
- 경찰... 그 때는 수도청장이라 이래가지고 그 아주 힘이라는거는 아주 방대했었으니까 그야 뭐 사유재산 아니라도 뭐 그 좀 낼수 있지 않았겠어요?

아마 그러니까 그 때 돈 있던 사람들꺼 같은 거 좀 끌어다 연결시키고 그런 역할도 했을런지 모르겠어요.
- 그..그래요.

그러면 그러한 이박사가 이제 한민당하고 손을 끊게 되는 계기에 대해서 좀..
- 아 그건 훨씬 후의 얘긴데 처음에 좀.. 이박사가 환국하신 후부터 한민당에서 적극적으로 지지를 했고 나오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이제 그 참 1945년 12월 28일날 모스크바에서 그 미국, 영국, 소련 삼상 외상 회담이라고 해가지고 우리나라를 5년동안 신탁통치 한다 하는 결정을 발표하지않았어요? 그래가지구 거기에 따라가지구 1946년 5월 6일날 서울 덕수궁에서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그 때 열렸었죠. 그 때 이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벌써 아마 우리나라를 신탁통치 하겠다는 모스크바 삼상 결정이 떨어지자 뭐 이거 남한 천지에는 이 반탁 결사반대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그 뭐 운동이라는거는 참 거 굉장한 운동이 벌어졌죠.

그 때 그 저 좌일진형에서 하룻밤 사이에 태도를 표변했죠.
- 그렇죠. 맞죠. 처음에도 박흔영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들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 이래가지고 동일보조로 나오다가 그 다음에 모스크바에서 지령이 와가지고는 이 놈을 갖다가 하루 사이에 뒤집어가지고 우리는 찬탁이다 다시말하자면 신탁통치 받겠소 하고 공단장대에 나왔어요.

좌우의 대립이 그 때 이제 찬탁이냐 반탁이냐서부터 시작된거죠.
-그러니까 그 전에 그건 뭐 결정적으로 갈라진거고 신탁통치를 중심으로 해가지고 정치노선이 확연히 갈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전에 벌써 아마 말하자면 우리 민족 진영들을 친일파 민족 반역자로 규정해가지고 자꾸 이거부터 수정하고 통합을 하자고 좌익들이 주장하고 나왔어요.

어저께 얘기한 그 때 부터죠.
- 그렇죠. 그렇죠. 그 주장이 그 때부터 벌써 아마 갈라지는 계기가 이룩됬댔죠.

그러면 좌익은 그렇게 해서 갈라졌고, 이번에는 민족세력인 한민당과 이박사 간에 또 역시 금이가는...
- 그거는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을 적에 제2차 미·소 공동위위회가 열리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한민당 이박사 또 이제 임시정부 심지어는 임시정부 요인의 한분인 김계식 박사까지 포함해서 완전히 민족세력이라는전 총단합해가지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선두에 나섰어요. 또 이걸 염두했고. 그러던 것이 이제 47년 5월 21일날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렸죠. 이 때에 무슨일이 있었느냐 하면은 그 미군정 측에서는 반탁을 주장하는 사람도 협의대상 말하자면 미·소 공동위원회의 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는 공식담화를 발표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한민당의 그 당시 주장은 바깥에서만 이렇게 반대할 것이 아니라 미·소 공동위원회 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은 그 때 그 유명한 5호 서명이라고 있어요. 5호에 서명하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만 협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규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민당의 주장은 그 5호 서명을 하고 들어가서 임시정부 수립 문제가 나왔을 적에 우리는 내놓고 반탁을 하자 이런 이제 주장이 됬고, 김구 주석이나 이승만 박사의 주장은 아니다 거기에다가 서명하는 그 자체가 신탁 통치를 받을 수도 있다 하는것을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결사적으로 이거는 있을 수 없다 이래가지고 말하자면 그 완전히 의견의 대립을 가져왔어요.

그러면 그 의견 대립이 폭발했다고 할까요 그런게 언제가 되나요?
- 네. 그게 내가 우연히 극적인 장면을 직접 그 돈암장에서 목격을 했었는데 그러니까 그것이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고 5월 21일날 열렸는데 5월 그게 아마 말일께 말일이었죠. 말일에 이제 마침 그 날 내가 무슨 일이 있어가지고 이제 그 돈암장에 들렀더라니까 당시 이제 돈암장에 비서이던 이기붕 씨가 빨리 그 이제 이박사 있는데로 가보라는 거예요. 그 무슨일인가 해서 이제 이박사 계시는 방으로 쓱 들어섰죠. 들어섰더라니까 그 때 이제 그 나보다도 앞서서 와서 있던 분이 한국 민주당을 대표해서 인촌 김성수 선생하고, 장덕수 선생하고, 지금 기억에 아마 김준연 선생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세분인가 그 민주 한민당의 최고 간부가 와서 계세요. 근데 벌써 아마 문간에 들어서니까 이박사 께서는 흥분을 하셔가지고 아무 얼굴이 시뻘겋게 최고로 흥분을 했습디다. 이래가지곤 제가 들어가니까 잘왔다고 박군 잘왔다고 이러면서 대뜸 내손을 붙들고는 어디로 들어갔냐면 침실로 데리고 들어 갑디다. 그래 인제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참 그런줄 몰랐다 이박사 얘기가 참 이렇게 괴씸할 수가 있느냐 아 이제와서 날 보고 신탁 통치를 받고 말이지 5호 서명에 날 보고 서명을 하라그러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그러면서 펄쩍펄쩍 뛰면서 말이지 눈물을 죽죽 흘립디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때도 한민당도 반탁은 반탁인데 방법론의 차이가...
- 그렇죠. 그렇죠. 방법론의 차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하여튼 그 방법론이 문제예요.
- 그래요. 네.

그러면 한민당 그 때 그 이박사하고 그렇게 금이 가기 시작한 직후 부터 말이죠 어떠한 방향으로 이박사가 태도를 바꾸어 나가게 됬는지요.
- 그러니까 이제 한민당과는 그러니까 방법론 차이로 말이죠. 금이가지 않았어요? 근데 그게 이제 미·소 공동위원회가 성공을 했었더라면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전혀 달라졌지 않겠어요? 근데 다행히 이박사가 그렇게 단독적으로 결의를 하고 김구 주석과 이제 완전히 노선에 있어서 합체를 가져오지 않았어요? 이래가지고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세력이죠. 그 세력과 이승만 박사가 완전히 뭉쳐져가지고 전국적인 반탁 지령을 내렸습니다. 이래가지고는 전국적으로 미·소 공동위원회 열리고 있을 적에 말이지. 그러니까 1947년 6월 23일날 이박사의 지령에 의거해서 전국적으로 반탁시위운동이 일어났어요. 이 때 그 유명한 덕수궁앞에 학년 대표였던 이철승 씨가 땅끄가 미군 땅끄가 그 땐 막 경계를 하고 그랬거든요. 그 경계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들이 그 반탁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결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아무런 상관없이 완전히 아주 그냥 깨지고 말았죠.

그러면 그 때 이 후로 이제 결국 한민당하고의 관계가 끊어졌는데 이러한 결국 나중나중까지 여러가지로..
- 그니까 이제 이박사로 봐가지고는 한민당으로 봐선 이박사와 이렇게 갈라짐으로 인해가지고 이박사로 부터 신용을 잃어버렸죠 한민당이. 말하자면.

또 거꾸로도 얘기할 수 있고
- 그렇죠. 거꾸로도 얘기할 수 있고

아마 이런것이 정부수립 직후에 조각같은데에 있어서도 아마 큰 변동을 가져왔을 겁니다.
- 네. 그 뭐 참 이 한민당의 그 때 당시의 이박사를 떠받든 그와 같은 공적이나 모든걸로 봐가지고는 초대 국무총리의 그 때에 우리도 생각하기에는 이건 틀림없이 김영수 한민당의 당신 김성수 선생이 국무총리가 될거다 하는 정도로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뒤에 결국 김구 주석하고도 또 틀어지게 됬죠 이박사가.
- 네 . 그 후에 인제 미·소 공동위원회가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열된 후에 드디어는 참 김구 선생과 갈라지는 그런 비극을 가져왔었죠.

그럼 내일은 김구 선생하고의 관계를 좀 얘기해 주십시오.
- 그러죠.

*5회는 방송당시 회차가 누락되었습니다.

제3회 이박사와 박헌영 제6회 이박사와 김구 선생


(입력일 : 2007.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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