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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경무대 비화 - 제3회 이박사와 박헌영
경무대 비화
제3회 이박사와 박헌영
1965.01.19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경무대비화’는 당시 경무대 초대 정치 비서관이었던 박용만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씨와의 대담입니다. 》

- 오늘은 돈암장 시절의 이박사 이 얘기 저 얘기를 좀 듣고자 합니다.

어저께 얘기를 했지만 돈암장 당시에 있어서의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와의 얘기를 오늘 좀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 이제 박헌영이를 젤 처음에 인제 제가 본 거는요 어디서 봤는냐 하면은 1945년 10월 25일날 그러니까 이젠 그 이박사가 귀국하셔가지고 그 때만 하더라도 이제 우리나라 해방직후의 정당 사회 단체가 무려 한 50여단체가 있었어요. 그래가지고는 서로 갈라져가지고 뭐 쌈질을 하고 이래서 도저히 그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박사께서 귀국하시자 마자 바로 그 이튿날 전국 기자들을 회견한 자리에서 뭐라고 일성을 갔다가 말씀 하셨냐 하면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하는 말을 그 때 하셨어요. 그 때 그저 이. 지금 생각하면 뭐 평범한 얘기죠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하는 얘기가. 그러나 그 때 그 당시로 봐가지고는 그야말로 그 말씀 한 마디가 중천금이라고 할까. 참 가치있는 그런 말씀이 됐어요.

- 초기에는 결국 좌익 주익이 결국 그렇게 까지 심하게 대립은 안하다가 나중에 어떤 계기를 잡아가지고 아주 전면적으로 대립을 하게된 것 같은데...
그렇죠. 이제 그 처음에는 그러니까 이박사가 조선호텔에서 10월 25일날 좌우익을 막론하고 전국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을 갔다가 약 한 200명 가까이 됐어요. 그 자리에서 무슨 얘기가 됐느냐 하면은 우리가 지금 이렇게 흩어져 있어가지고는 도저히 외국에서 대한민족은 흩어져서 싸움질만 하지 뭉쳐가지고 일할 줄 모르는 민족들이다. 이래가지고 독립할수도 없는 백성들이다 그러한 외국의 여론이 많이 퍼져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박사께서 결국 이래가지고는 안되니까 어떠한 이름하에라도 한 덩어리로 뭉쳤다는 것을 우선 외국에 알려야 된다.하는 것을 이제 그 첫 회합에서 역설을 했었죠.

- 그게 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그러니까 전이요?
열리기 훨씬 전이죠. 그러니까 그거는 바로 이제 그 1945년 10월 25일 날이 됐으니까. 그 때 이제 그 첫 회합의 사회를 누가 맡아 봤느냐 하면 윤채영씨가 사회를 맡아 봤습어요.

- 그 때는 이제 좌익도 전부 모였고.
그렇죠. 그 때 이제 그 박헌영, 여운형, 안재홍씨 이래가지고 뭐 전부다 총망라됐었죠.

- 그 때 회의가 말하자면 우리나라 정당들이 모인 회의로는 처음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죠. 그렇게 대동단결해가지고 모여보기는 그게 젤 시초됐죠.

- 단결은 됐던 건 아니고 우선 모이기만 했던거죠.
그렇죠. 그렇죠. 모이긴 그 자체만 하더라도 젤 처음이 됐어요.

- 그 때 그 회의 광경 좀 생각나시는 대로.
그 때 그러니까 이제 그 회의를 갔다가 윤채영씨가 처음에 이제 사회를 해서 나가는데 대뜸 어떤 사람이 “일양! 사회”하면서 이제 발언권을 정해요. 그때만 하더라도 그게 누군지 몰랐죠. 저도 그 때는 이제 학생단체 대표의 자격으로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을 했었는데, 그 이제 발언권을 주지도 않는데 일어서서 하는 얘기가 “아 이 친일파 민족반역자는 물러나라”고 말이지 고함을 지르면서 야단이에요. 물론 그건 이제 윤채영씨를 가지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때 이 좌익들은 덮어놓고 민족진영 사람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라고 아주 규정을 지으면서 이 사람들을 몰아낼라고 좌익에서는 하나의 ....를 내세웠더랬어요. 그러니까 인제 그 날 회의에도 개회 벽두에 무슨 얘기가 나오기도 전에 친일파 민족반역자부터 먼저 몰아내라 하는 걸로 떠들더군요. 그러니까 이제 좌익진영의 정당 대표들은 “옳소!” 하고 박수를 치고 야단을 치게 되고 뭐 대회가 진척될 수가 없었어요.

- 몇 시간이아 끌었는데요? 그 날 대회...
그 날 대회에 아마 한 한시간 이상 그 이제 그렇게 대회장을 좌익들이 말이지 혼란을 시켜가지고 결코 대회가 안될적에 할수 없어 이박사가 의장석에 나오셨어요. 나오셔 가지고 “당신네들 말이지 그렇게 떠들면 회의가 안되니까 말이지 좀 진정하라”고 이렇게 고함을 지르니까 그 때서야 그렇게 떠들던 좌익의 대표단들도 쥐죽은 듯이 가만히 그저 조용하게 착석을 하더군요. 이래가지고 이제 이 날 회의가 진행이 됐어요.

- 그 날 무슨 회의 성과는 뭐 였어요?
그래서 이제 그 모임의 명칭을 붙이게 됐죠. 그래서 그 모임의 명칭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명칭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의장을 만장일치로 이승만 박사를 만장일치고 추대를 하고 그날 이제 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제1차 회합이 그 날로 끝났습니다.

- 2차 회합은 언제 부터..
2차 회합은 1차 회합이 끝난 이튿날 2일후에 10월 27일일날 천도교당에서 제 2차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열였어요. 그 때 열린적에 1차 회합때는 너무나 무질서 하고 각 단체에서 가령 예를 들면 세산람 온 데도 있고 다섯 사람 온데도 있고 이래 가지고 제 2차 회의때는 각 단체 각 정당에서 대표 두사람씩만 들어오기고 했습니다. 대표 두사람씩만 들어와 가지고도 그 넓은 청도교 강당이 초만원이 됐어요.

- 하여튼 그 때 뭐 굉장히 정당이 많았으니까.
근데 이제 재미나는 얘기가 그 때 이제 제가 이끌고 있던 조선유학생독립위원회에서 엦 경비를 할 사람들이 없어서 우리가 맡아서 봐줬어요.

- 그 땐 아직 테러같은게 있기 전이던가요?
그 땐 아직 좌익 테러가 있기 전입니다.

- 대립이 없었으니까.
네. 그런데 이제 문간에서 막싸움이 벌어졌어요. 그 왠일인가 싶어가지고 대원이 와 가지고 그 때는 이제 제가 대장이 됐는데 “문간에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하는 얘길 해요. 그래 이제 나가봤더라니까 그 이제 제 1차회합때 가장 떠들던 무태 안경을 낀 사나이, 그 사람이 이제 바로 박헌영인데 이 사나이가 무조건하고 대표 셋이 들어오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여보, 당신을 어데 소속이냐”고 “아, 전국을 지금 호통하고 있는 조선공산당을 몰라보는냐”고 “내가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다”이거에요 “조선 공산당은 전국에 조직만을 두고 있는 큰 정당이기 때문에 대표 세사람은 넣어 줘야 될 것 아니냐” 이거에요. 그래 내가 있다가 “여보시오 아무리 크더라도 말이지 대표 세사람이라는 것은 규정에 없다 크든 작던간에 정당사회단체에서 대표 2명을 초청한거니까 두 사람만 들어오시요.” 이래 가지고 한참 옥신각신 싸움한 끝에 결국은 이제 그 조선공산당을 대표해서 대표 두사람밖에 참석을 못했었죠.

- 거기에서는 결국 무슨 성과가 있었던가요? 그 회의에서.
네, 그 회의에서 첫째 저희가 합의 본 것은 우선 우리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느 단체 밑에 좌우를 막론하고 전 민족이 총 단결 됐다. 하는 것은 외국에다가 세계에다가 알리기 위해서 연합국에는 메세지를 보내고 전 세계 공동 ...를 발표를 하도록 이맇게 이제 회의에서 합의를 봤어요. 합의를 보고 이제 메세지를 작성하는 대표 일곱사람을 뽑도록 회의에서 결정을 지으고 그래서 대표 일곱사람의 인선은 의장인 이박사에게 일임을 한다 하는 걸로 결정 지으로 이제 해산을 했죠. 그 날 모임을

- 근데 어떻게 해가 박헌영 같은 사람들이 우익하고 대립을 하게...그 계기가.
대표 일곱사람을 뽑는데 그 이제 이박사가 그러니까 국내에 돌아오셔 가지고 국내 실정이라던지 인사에 대해서 상당히 어둡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제 대표 일곱 사람을 뽑는데, 전형한 이박사가 어떻게 전형을 했느냐 하면 좌익계라고 지목이 되는 박헌영, 여운형 이 두사람이 이외의 나머지 다섯사람은 전부 다 한민당 드 때 당시에 한민당에 속해 있는 인사로서 이렇게 뽑았어요. 여기에 말하자면 박헌영이와 어운형은 굉장한 불만을 품고 “이거 얘기가 안된다 대표 일곱사람을 뽑는데 적어도 우리가 조직이 제일 강한 우리들을 두 사람만 해주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다 한민당으로 한다는게 말이 되는냐” 이래가지고 돈암장에서 회합을 가젹을 때 박헌영이와 여운형은 아주 탈퇴하고 말았어요. 이래가지고 좌우릭의 재차 회합을 그 후 영원히 열리지 못했죠. 그러곤 이제 박헌영과 이박사는 다시는 또 만나가지고 국사를 의논한다던지 우리나라 정부 수립을 위해서 상의를 한다든지 이런거 없이 좌우익은 그 때부터 완전히 아주 결렬됐습니다.

- 그래가지고 아마 조금있다 인제 정치테러 같은게 나오기 시작했겠죠.
그렇죠. 그렇게 결렬되고 난 후에 좌익은 극단적으로 이박사 반대를 공식적으로 이제 표명하고 나왔고 뿐만아니라 이제 그 참 이 좌익에서는 비합법운동 말하자면 반미운동과 또 하나는 테러, 그래 해가지고 우익진영을 주요인사들을 테러로서 암살하는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테러행위로 좌익은 완전히 전술을 바꾸고 나왔어요.

- 그러면 그러한 좌우익 대립속에서 속에서 말이죠 돈암장 시절의 인제 이박사가 여러모로 머리를 짜내고 이렇게 해가며 해왔다는 얘긴데, 고 때 역시 정치 참모는 요전에 얘기한데로 윤채영씨가 위주였던가요?
그 때는 그저 그러니까 윤채영씨 비서관으로서 그것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더 크게 영향력을 끼쳤던거는 이박사가 귀국을 하셔가지고 일체의 정치적인 뒤받침이 라던지 이런거는 당시의 민족진영의 집결체라고도 볼 수 있는 말이지 한민당의 중요인사들이 이박사에게 많이 도움을 줬고 지지하고 여러가지 조언도 했어요.

- 그러니까 결국 한민당과 맨 처음에 이박사가 손잡고 나오기 시작한게 정치활동의 시작이죠?
그렇죠 한민당하고 손잡은 건 뭐 이박사가 귀국하시자 바로 그 한민당에서들... 왜그런가 하면 그 분들이 참 민족진영의 이박사노선과 같고 또 민족진영이고 이러니까 자연히 이제 이박사하고는 이제 가까워 졌고, 또 이제 이박사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속해 있던 거는 여기서 한민당에 있는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써 보였고 또 실지로도 그랬었구요. 아까 얘기가 돌아가지만은 돈암장에서 좌우가 완전히 갈라진 후에 말이죠 심지어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1945년 11월 달이죠. 그러니까 박헌영이하고 완전히 갈라진 후에 좌익의 청년돌격대 같은 청년이나 혹은 이제 여운형씨 딸인 여형구 이런 사람들이 집단이 되가지고 이박사한테 설득을 강요하려고 월담을 해 들어와 가지고 일대 소동을 일으킨...

- 담을 넘어왔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월담. 그러기때문에 이제 월담이라고 그랬을 적에 우리가 알기로는 그 때 월담사건이라는게 말하자면 요새 안국동의 월담했다하는 그 얘기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을 거에요.

- 알겠습니다. 그러면은 이 다음에는 한민당과 여러가지 이박사와의 관계를 말씀 듣기로 하죠.

제2회 프란체스카 여사의 인상 제4회 이박사와 한민당


(입력일 : 200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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