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대비화’는 당시 경무대 초대 정치 비서관이었던 박용만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씨와의 대담입니다. 》
-프란체스카 여사의 얘기가 많이 나왔습니다만은 오늘은 좀 우리나라에 돌아온 프란체스카 여사의 인상 같은 것을 좀 말씀해 주십시요..
예. 그러니까 프란체스카 여사가 우리나라에 돌아온것은 1945년 12월달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처음 인상을 말하자면 대단히 말랐었어요. 눈이 푹 들어가고 배싹 말른 노인에다가 눈은 새파랗고 해가지고 대단히 옆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친밀감 이랄까 이런걸 느낄 수 없는 그러한 외국 부인이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때 우리말은 전혀 못했을거고..
그렇죠 우리말은 전혀 모르고 주로 미국말 또 독일말을 퍽 잘했었어요.
-원래 프란체스카여사가 호주 부인이다라고 와전되고 있는데 그게 아니죠.
예, 그렇죠. 흔히 우리나라 항간에서는 호주댁 호주댁 프란체스카 여사를 부르기를 호주댁이라고 불렀는데 호주가 아니고 오지리 태생이 오지리 태생이죠. 그래서 이제 6·25때 세이버 제트기를 보고 호주댁 나라에서 날아온 비행기다고 얘길 했었죠.
-결국 프란체스카 여사하고 이박사가 결혼한게 미국에서 였는데 그전에 본부인이 계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죠.
그 프란체스카 여사하고 결혼하기전에 그러니까 이박사가께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무기징역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7년동안 감옥살이를 하셨어요. 그때 한국 부인이 있었댔는데 감옥생활을 하고 나와서는 그 부인과도 사이가 좋지 않고 트러블이 일어나서 별거생활을 했다는 걸로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때 소생이 아마 있었던가 그렇죠.
그랬죠. 그때 우리나라 한국사람과의 소생이 있어가지고 이박사가 미국으로 망명할적에 소생된 어린애를 데리고 갔어요.
-아아 그럼 미국에서도 쭈욱 아들이죠? 그 아들하고 같이 지냈던가요?
미국에서 같이 지내다가 아들이 14살때 죽었답니다. 하와이서. 그리고 부인이 이박사께서 우리나라에 해방후 환국하셔 가지고도 그 부인이 생존해 있었어요. 이박사가 돈암장에 계실때 그 부인이 수차 찾아 왔던일이 있었어요. 근데 물론 그때 이박사가 직접 만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지만 여러번 찾아왔던 일까지 있었어요.
-그럼 어제 얘기 이박사가 환국해 가지고 상당히 몸살을 앓은 것 같이 되어 있었는데..
그니까 이박사가 귀국해서 돈암장에 있을적에 아마 12월달일 거에요. 그때 풍토도 달라지고 오랜동안 망명생활의 고초, 이런걸로 해가지고 병환으로 오랫동안 신음했죠.
-프란체스카 여사가 와 가지고 인저 상당히.
프란체스카 여사가 왔을적에는 거의 완쾌되어 있었죠.
-프란체스카여사가 결국 이박사의 건강, 몸에 대해서 굉장히 신경을 쓰는 걸로 이제까지도 알려지고 있었는데..
그 점은 굉장하죠. 그저 참 뭔가 프란체스카여사가 이박사에 대해 건강을 염려하는 것은 아마 우리나라 부인으로서도 그렇게까지는 하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했어요. 그렇기때문에 이박사의 건강 위주로 해가지고는 참 여한것도 불사한다. 하는 정도까지 건강을 위하기 때문에 가령 예를 든다면 이박사가 대통령 되신 후에 일선시찰 같은 것을 자주 하지 않았어요?
-예.자주했죠.
그때도 도시락을 부인이 만들도록 해가지고는 수행원한테 가져가지고 가도록 해가지고는 시간이 12시가 딱 되면 산고지든 참호속이든간에 가져가신 도시락을 잡수시도록 이렇게까지 세밀한 주의를 기울였어요.
-이박사는 주로 양식을 많이 드셨나요? 한식보다도 어땠어요?
그때 음식이 그러니까 짬뽕이죠. 한식을 드실때도 있고 양식을 드실때도 있고.. 그렇지만 프란체스카여사가 돌아와가지고는 이박사의 음식에 대해 가지고는 까다로웠어요. 이박사가 겨울철이 되면 냉면이 먹고 싶다. 그랬을적에도 이건 한국에서 만든 냉면은 위생상 좋지 않다. 이런 생각을 프란체스카여사가 가지고 그런것은 잡수지 못하도록 하고 식사에 대해서는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어쨌든 요즘 하와이에서 누워있는 이박사 앞에 나타났던 몇몇 사람들 있잖습니까? 최근에 최치환씨도 다녀왔고 오재경씨도 거년에 갔다왔죠. 최치환의원의 얘기를 들어보면 뭐 그때 경무대 시절하고 프란체스카 여사 하고 똑같답니다. 만나는 면회하는 사람 일일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체크도 해서 말하자면 1분 만날 사람은 1분간 딱 지정해주고 5분 만날 사람은 5분 지정해주고 음식도 여전히 프란체스카여사가 손수 만들고.. 옛날에도 역시 프란체스카 여사 거치지 않은 음식은 단 한개라도 못가도록..
경무대에서도 보면은 식사가 되면 일단 부인이 시식이라고 할까 먼저 떠먹어보고 대통령께도 드렸으니까요.
-옛날 왕, 임금시절 그때하고 다를게 없구만요.
-프란체스카 여사하고 이박사하고 말하자면 상당히 의의가 좋은걸로 전해지고 있는데..
두 부부간의 애정이랄까 사이는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가령 날이 좀 따뜻하다든지..한 날은 경무대 바로 앞에 현관들어가는 데 널직한 터가 있잖아요.
줄을 쳐놓고 두 부부가 테니스도 하고 또 경무대 현관에서 그때 인제 대통령께서 2층에 계셨는데..2층까지 올라가는데 서로 요이땅 해가지고 애들마냥 달음박질하고 해서 뛰고..다정스럽게 지내면서 그때 이박사께서는 프란체스카여사를 보고 단둘이가 내외분이 있을적에 부를기를 뭐라고 불렀냐하면..이박사께서는 `매미` 하고 프란체스카 여사를 부르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박사를 파파..라고 불렀어요
-두분 사이는 우리말을 못하니까 언제나 영어로 했겠구요?
그렇죠. 늘 언제나 회화는 영어로 ..공식적으로는 대통령께서는 마담 우리도 프여사를 부를적에는 마담이라고 부르고, 또 프란체스카여사는 대통령을 보고는 프레지던트... 이렇게 공식적으로 불러나갔죠.
-어쨌든 두분이 소생이 없고 그런 탓인지..참 의의가 좋고, 바깥에까지 알려져 왔는데 이런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박사를 상다히 좌지우지까지 했다. 이런 얘기도 들려오잖아요? 어느 정도까지인지?
그건 역시 부부 사이가 돈독하다 보니까 때에 따라서는 부인이 원하는것 부인이 꼭 하고 싶은 것은 이런것은 이박사께 얘기를 해요. 이박사께서는 부인의 얘기를 안들어주고는 베겨나질 못할 정도 였습니다. 왜 그런가하니 역시 여자가 되고 부인이고 보니 이박사께 자꾸 졸라요. 요걸 해주어야 하는데 왜 안해주느냐? 하는 식으로..그걸 가지고 조석으로 맨날 졸라제끼니 그 이박사께서 그 뭐 단촐한 식구에 그런 얘기를 안들어줄래야 안들어 줄 수 없는 그런 일들이 벌어졌었죠.
-대부분의 경우는 대개 다 얘기 들어주는군요.
저가 알기로는 부인의 부탁이라든지 하는 것은 이박사께서 안들을 수 없어서 들어줬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렇게 프란체스카여사가 결국 이박사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하면 프란체스카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야말로 상당한 작용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죠. 프란체스카여사가 저가 알기에는 공적인 영향을 끼치기 보다는 사적인 면에서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컸다. 그러고 또 이박사 부인이신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박사께 부탁을 드리는 것도 공적인 중대한 일보다는 사적인 요런 일들.. 가령 예를 들어서..중대하다 고도 볼 수 있겠죠. 사람을 추천한다. 또 어떤 사람을 나쁘다. 했을적에 부인이 곁에서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이 사람은 나쁜사람이다. 이래서 나쁜 사람이라고 판정해가지고 멀리 한다든지 좋은 사람이라고 자기가 천거해서 어떤 자리에 앉힌다는지 이러한 경우는 있었다고 보이죠.
-그런 경우에는 어제 얘기나온 이기붕씨의 부인인 박마리아여사 같은 분이 프란체스카 여사와 워낙 가까워 놓으니까 박마리아 여사께서 여러가지로 영향력을 끼쳤다.
프란체스카여사하고 가장 가까웠던 분이 박마리아 여사였고 또 박마리아여사로 봐서는 프란체스카여사를 통해서 프란체스카 여사를 가장 성격을 잘 이해하고 그 분을 십이분 활용한 분이 역시 박마리아씨다. 이렇게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자세한 프란체스카여사와 박마리아여사와의 관계라든가 그런 또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많을테니까요. 오늘은 주로 돈암장에서 이박사의 지난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 요다음번에는 우리나라 정부수립전에 가장 참 격심했던 정치 파동기 좌우익 싸움, 이런 얘기를 주로해서 들려주시겠습니까?
요다음에는 뭔가 돈암장과 우리나라 초창기의 그런 일화들이 많고 또 정치적으로도 여러가지 많은 만큼 요 다음번에는 이승만박사와 박헌영, 조선공산당 당수인 박헌영과의 관계 이런 걸 한번 얘길 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애요.
-그럼 들어보지요.
제1회 경무대 장막을 헤치고 ◀ ▶ 제3회 이박사와 박헌영 (입력일 : 2007.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