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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정계야화
경무대 비화 - 제1회 경무대 장막을 헤치고
경무대 비화
제1회 경무대 장막을 헤치고
1965.01.15 방송
‘정계야화’는 65년 1월 4일부터 방송한 15분짜리 대담프로그램으로 70년 10월 5일부터 나간 다큐멘터리 드라마 ‘정계야화’의 원조격이다. 이 프로그램은 광복 20년과 6·25전쟁 15년을 맞아 기획한 것으로, 정계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자서전적인 회고담과 함께 정계의 뒷얘기를 들려줘 청취자들의 인기를 모았다.
《정부가 수립된지 근 20년, 우리나라 정치도 자랄만큼 자란 지금. 지난날 권부의 정상이었던 경무대, 그 곳을 둘러싸고 수많은 정치인의 면면. 그리고 그 주변에 오고 간 가지가지 숨은 얘기들. 지금 이 시점에선 이런 일들을 돌이켜 보는 것도 적지않은 참고와 교훈도 될 것입니다.

여기 당시 경무대 초대 정치 비서관이었던 박용만씨와 동아일보 정치부장 신동준씨와의 이 얘기 저 얘기를 보냅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순서로 `경무대 장막을 헤치고` 편입니다.》

먼저 박선생이 어떻게 해서 경무대에 들어가게 된건지 부터 궁금하군요.

- 네, 그러니까 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48년 7월의 어느날 입니다. 그 날 그 때 이박사 비서였던 이기붕씨 댁에 제가 놀러를 갔었죠.

그때 이기붕씨 댁이 서대문 신문로인가요? 거기가 아니였죠 아마?

- 네, 그때는 이기붕씨 댁이 그 집이 아니고 북아현동 고개를 쭉 넘어가면 거기에 조그마한 한식 가옥을 쓰고 있었습니다.

어느 몇평이나 되는 건물이에요?

- 건물은 한 열칸짜리 정도의 건물이었죠.

오막살이로구만. 그 때 처음 찾아가신 건가요?

- 그러니까 이기붕씨는 그 전에도 알고 이래서 더러 그 집에 놀러는 갔었죠.

그 때 이기붕씨 댁에는 가족들이 누구 누구?

- 그 때 이기붕씨의 어머니가 계셨고 그 다음에 박마리아씨 맏딸 강희 장남 강석이 차남 강욱이 그렇게 해서 식구가 단촐했었습니다.

강석이는 그 때 몇살쯤 됐던가요

- 그러니가 강석이 강욱이 그 둘은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강희가 그때 처음 이화여중 들어가서 1학년때 였죠.

그때 이기붕씨가 집에 있었던가요?

- 그 날 마침 일요일날이 되고 이래서 온 가족이 전부다 오손도손 모여 앉았더군요

그 자리에서 비서 얘기가 나온건가요?

- 네, 그 자리에서 비서얘기가 나왔는데, 실은 그 때 처음 나왔던 얘기가 아니고, 그 전부터 이박사 비서를 좀 해달라고 하는 얘기는 여러번 그런 교섭은 받았었죠.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대학교의 재학생이었고 이래서 비서직에 들어가질 않았었습니다.

박선생님을 굳이 비서로 택할려고 했던데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 그건 이제 이박사가 1945년 10월 16일날 이박사가 우리나라에 환국하신 이후부터 이박사를 만났고 또 자주 이박사와 출입도 하고 이기붕씨도 잘 알고 이러니까 아마 자기로서는 아마 믿을수 있는 사람이다 이래서 아마 나를 비서를 시킬려고 애를 썼던 모양이에요.

대뜸 비서직이 승낙이 됐어요 그래?

- 그때만 하더라도 비서를 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그 때 하나의 욕심으로 얘기를 한다면 미국에 유학을 가보겠다 하는 그런 욕심은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미국유학을 가겠다고 그 때 이기붕씨에게 얘기를 했죠. 그러니까 이기붕씨 얘기가 우리나라 정부도 수립되고 했으니까 얼마든지 갈 기회가 있을테니 좀 참고 우선 대통령 비서관으로서 일 좀 해달라 부탁을 받았죠.

나중에 미국유학 가셨어요?

- 이박사의 비사관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결국 미국유학은 못 가고 말았죠.

출근은 언제부터 하게됐어요?

- 출근은 내가 비서직을 수락한 그 이튿날 부터 출근을 했습니다.

경무대인가요?

- 그 때 경무대에도 비서실이 있었고 중앙청에 대통령실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실이 있어서 이박사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경무대에서 오전 아홉시면 반드시 경무대에서 중앙청 대통령실로 출근을 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무, 또 사람 만나는거 여러가지 중요한 일들은 전부다 중앙청 대통령실에서 했습니다.

그럼 대통령실에서 결국 만나게 됐군요.

- 네, 그러니까 대통령실 비서관으로서 일을 갔었죠.

아니 대통령 처음 비서진으로서 출근한게 말이죠.

- 네, 비서로서 출근한건 그 처음이죠. 중앙청으로..

그 때 대통령이 뭐라고 분부 얘기를 했어요?

- 대통령 비서로써 출근을 해가지고 인사를 드리니까 퍽 반가워 합디다. 잘 일해달라고 하면서 등을 치면서 퍽 좋아했어요.

그 양반이 그때도 역시 우리말을 잘 못했죠?

- 그때는 그래도 우리말이 퍽 세련되기 시작했을 적이고. 처음에 이박사가 돌아오셔서 조선호텔에서 만났을 적에는 정말 참 이게 무슨 얘기를 하는 지를 알아 들을수 없을 정도로..

조선호텔에는 무슨 관계로 만나셨습니다.

- 조선호텔에 만날 적에는 그 때 제가 동경서 와세다 대학의 문학부에 다니는 학생시절이었는데, 그때 이제 조국이 해방되기 4월달에 들어와서 해방이 바로 되자 유학생 동맹이라는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유학생 동맹 위원장으로 있고 이래서 이박사와 여러가지 시국담도 논하기 위해서 또 인사도 드릴 겸 해서 조선호텔 찾아가서 만났죠.

그땐 사방 정치인들 다 찾아다닌거 아니에요?

- 그럴 필요가 없었죠. 그 때는.

그 때는 결국 우리말 거의 못했을 때 아니에요?

- 그 떄 그래도 우리말로 전부 다 얘기를 했었어요. 그런데 액센트가 미국식 발음이 되어 가지고 도무지 알아듣기가 좀 어려웠었고. 그나마 서툰 우리말에다가 미국말이 자꾸 들어가더군요. 그래서 퍽 어색했어요.

역시 그 때 친근감 이런 것은 아마 다른 정치인 김구씨라던가 이런 분하고는 아마 달랐을런지도 몰라요.

- 그런것은 이제 대중적인 친근감. 처음 만난 인상도 역시 친근감보다는 그저 이분이 위대한 사람이다 하니까 어느정도 위엄이라할까 이런 존경하는 마음이 선입관은 가지고 만나니까 그런 면이 있었죠.

그 때부터 이박사만이 위대하다 그런 일편도 였구만요.

- 그거보다도 그 분이 애국자라고 좌우익을 막론하고 떠드는 시절이었으니까, 내 혼자만 애국자라고 해서 존경한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경했었죠.

그 때 그럼 중앙청 쪽의 비서진 진영은 어땠어요?

- 그 때 중앙청의 비서실장은 이기붕씨였구요. 그 다음에 비서진으로서는 전에 국회 국방위원장 지내던 김정애씨 오늘날 문총에 부위원장으로 있는 시인 김광섭씨 그리고 영어 잘하는 로열 킴, 김명천씨가 있었고 그리고 등등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경무대쪽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 경무대쪽에는 오랫동안 하던 황규면씨 또 오세창씨의 아드님이었던 오일육씨 두 분이 있었어요.

비서직은 뭘 담당하셨죠? 그 때?

- 그 때 제가 담당한건 일반 정치관계와 대통령 면회오는 사람들을 대통령과 면회시킬 사람과 면회시킬 필요도 없는 사람들을 이걸 구분해서 대통령 면회시킬 사람은 시키고 거절할 사람은 거절하고 했죠.

말하자면 문간에서 젤 가까운 비서구만.. 그때 이제 나이가 젊었으니까... 어땠어요? 면회오는 사람들 중에 별의별 사람 많았죠?

- 네, 별 사람이 다 많았습니다. 구체적으로 한 얘기를 들면요. 어떤 날인데 앉아 있으려니까 바로 비서실 옆이 경비실이 됐어요. 경비실이 떠들석하단 말이에요. 무슨일인가 싶어가지고 떡 나가보니까 백발이 허연 노인이 도포를 턱 입고 초신을 신었어요. 손으로 짠거 짚으로 짠거 그리고 큰 관을 쓰고... 옛날 과거한 사람들이 쓰는 커다란 관 있잖아요 그걸 쓰고 떡하니 나타났어요. 왜 그러느냐고 내가 가서 공손히 인사를 하고 얘기를 하니까 그 영감님이 하는 얘기가 걸작이에요. 내가 이 나라의 왕이다 이거야 내가 왕인데 옥좌로 나를 모셔라.

돌은 사람이로군요.

- 그 때 내가 생각하기에는 돌은 사람으로는 안 보였어요. 의복이 너무나 깨끗하고 옛날식인 도포를... 품위도 있고 확실히 이건 돌은 사람이 아닌데. 옥좌로 나를 모셔라 이거야. 그래서 우리나라는 왕이 없다고 이러니까 말이지 내가 왕인데 무슨소리냐고 말이야. 여기는 대통령이 있는 곳이지 왕이 있는 곳이 아니라고 이러니까 말이야. 내가 왕인데 옥좌로 나를 모시지 않고 이런 고얀 놈들이 벨 수작을 다한다고... 그런 재밌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됐어요?

- 아, 이 양반이 암만해도 돌은 사람인가보다 싶어서 경비원을 불러가지고 이 양반을 병원으로 모시라고 그랬더라니까 이 영감이 그때서야 내 말을 알아듣고 혼비백산해서 말이지 아니라고 내가 왜 거길 가느냐고 총총 걸음으로 내뺀 일이 있었어요.

아주 돈 사람은 아니고 반쯤 돈 사람이로구만요.

- 그걸 봤을적에 난 지금도 돌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도 이상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아닌게 아니라 돈 사람 안 돈 사람 많이 왔을 꺼에요.

- 그 때는 면회오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십명입니다. 그래 가지고 참 분탕을 지웠죠.

그 때 역시 감투 알아보는 사람이 젤 많았...

- 그렇죠. 젤 많은 것이 역시 감투에요.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가장 감투를 좋아하는것 같아요.

감투 시장은 결국 경무대 시작서 부터 싸움이 시작된거에요.

- 그렇죠. 우리나라 역사의 대부분이 감투싸움 가지고 역사가 이루어지듯이 말이지 아마 그것은 아마 면할길이 없을 겁니다.



(입력일 : 2007.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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